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1961 · 1시간 55분
#로맨스 #멜로 #드라마 #느와르
뉴욕 맨해튼. 사교계의 유명인사 베로니카는 부와 명예를 위해 오늘도 파티에서 적당한 남자를 물색한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매일 아침 티파니 보석상 앞에서 아침을 먹으며 보잘것 없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멜로 소설가 실바나가 이사 오면서 두 사람은 이웃이 된다. 팬이자 후원자를 자처하는 여자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그 대가로 용돈을 받아 생활을 이어가던 실바나와 부유한 남자들에게 환심을 사서 결혼을 통해 팔자를 펴보려는 베로니카. 비슷한 처지의 둘은 자신의 단점을 허물 없이 내보일 수 있는 서로에게 점점 끌리게 되는데...
“자, 이건 이번 주 용돈.”
작은 핸드백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낸 여성이 산 지 얼마 안 된 듯한 자켓 주머니에 성의 없이 돈을 꽂아 넣었다. 침대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자켓의 주인인 실바나는 지폐를 세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금액을 가늠했다. 이 정도면 이 앞에 새로 생긴 스트립 바에서 술을 석 잔쯤 하고도 돈이 남았다. 아, 오늘은 비싼 술을 마실 수 있겠는데, 실바나가 웃으며 중얼거리자 흐트러졌던 옷을 정돈하고 매끈한 피부에 향수를 뿌리던 여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또 술? 글은 어쩌고.”
언뜻 보기에는 화가 났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둘 다 이게 가벼운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럭저럭 팔리는 멜로 소설 작가인 실바나가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여성에게 거스름돈 대신 서비스를 얹어주기로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쓰는 소설들은 사실 멜로 소설보다는 판타지 소설에 가까웠다. 사랑 같은 감정을 비웃고 남편이 있는 여자들에게 용돈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쓰는 게 판타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흐트러진 리본을 다시 묶어줄 정도로 가까워지자 남편이 좋아한다던 라벤더 향이 코끝에 진동했다. 남편이 오늘 출장에서 돌아온다고 했었지. 물론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실바나는 종종 애인들이 읽을만한 거짓된 글을 쓰고 용돈을 받아 술값으로 날리는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었다.
“내 뮤즈가 날 버리고 가는데 글을 어떻게 쓰지?”
“하여간 말은 잘해.”
이제야 기분이 좋아졌는지 허공에 가볍게 키스를 날린 여성이 나갈 채비를 마쳤다. 기꺼이 문 앞에서 그녀를 배웅하던 실바나의 시야에서 크림색 플레어스커트가 사라질 때 즈음 불쑥 까만 실크 드레스가 들어왔다. 그새 제법 친해진 윗집 아가씨의 옷이었다. 제법 화려하게 꾸민 모양새가 또 예의 마피아에게 다녀온 모양이라, 실바나는 문가에 기댄 채로 가볍게 인사했다.
“오늘도 교도소에 다녀오시는 길인가 봅니다.”
“네, 오늘도 씽씽이죠. 당신은요?”
“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러면 오늘은 우리 둘 다 저녁을 굶을 걱정은 없겠군요?”
베로니카가 까맣고 챙이 넓은 모자를 벗으며 웃었다. 이어질 대화의 흐름이 예상이 간 탓에 자연스럽게 그 모자를 받아 문 옆에 걸었다.
“저 앞에 있는 바에서 한잔할 정도는 충분히 되죠.”
“당신이 사는 건가요?”
“방금 둘 다 저녁을 굶을 일은 없겠다고 한 사람은 어디 갔지?”
“그 여자는 방금 우유병에 빠져 죽어버렸어요.”
“그렇다면 별수 없군, 제가 사는 수밖에. 갈까요, 아가씨?”
“네, 기꺼이.”
장난스레 손을 내밀자, 베로니카 역시 자연스럽게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까만 실크 장갑이 굳은살이 많은 손위에서 부드럽게 감겼다. 본의 아니게 한 발짝 당겨진 그녀가 코끝을 찡긋거리더니 속삭였다. 라벤더 향이네요. 실바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당신에게선 시가 향이 납니다.”
“오, 이건 돈의 향기예요.”
“제게 돈 냄새란 진한 향수라서.”
“그건 좀 부러운데.”
지나가던 행인이 들었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돌아봤을 대화를 하며 걷던 둘이 티파니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정확히는 베로니카가 걸음을 늦췄고 실바나는 그에 따랐을 뿐이지만. 둘 중 한 명은 보석에 영 흥미가 없었던 탓에 화려하게 꾸며진 통유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무심하기만 했다.
“티파니를 좋아하나 봅니다.”
“네, 좋아해요.”
“보석을 좋아해요?”
“…보석보다는…….”
당연히 그렇다는 답변과 함께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힐난을 각오하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머뭇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베로니카는 마치 그 유리 안에 있는 게 보석이 아니라 칠면조와 크리스마스 선물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실바나의 시선이 그런 베로니카에게 오래 머물렀다.
“티파니에는 평온함이 있지 않나요?”
“평온?”
“저 안에서는 모두가 친절하고 상냥하잖아요.”
당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봅니다, 실바나는 섣부른 추측이 입 밖을 빠져나가기 전에 삼키는 데에 성공했다. 베로니카가 원하는 것은 ‘화려한 티파니’가 아니라 ‘안전한 티파니’가 주는 평온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놓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그 뒤로도 그들은 주머니가 풍족해지는 날에 그 바에서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그때마다 티파니를 지나긴 했지만 그 이후로 베로니카가 화려한 유리창 앞에서 걸음을 멈춘 적은 없었다.
그런 생활을 한 두세 달 즈음 반복했을까.
얼굴이 취해서 발그레해진 채 자신에게 웃어주는 베로니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걸 깨달을 때 즈음, 평소보다 다소 과하게 취한 그녀를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날이었다. 실바나는 허공에 뜬 발을 동동거리는 베로니카를 차마 복도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하고, 안은 채로 낑낑대며 문을 연 뒤 푹신한 침대 위에 반쯤 던지듯 눕히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반쯤 눈을 감은 채 뭐라 중얼거리기만 하던 주정뱅이가 무슨 힘이 난 건지 튕기듯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숨겨놓은 샴페인을 찾아낸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한 잔 더 해야죠!”
베로니카는 거칠게 코르크를 딴 탓에 사방으로 거품이 튀기는 샴페인을 얇은 유리잔에 콸콸 쏟은 뒤 아직 겉옷도 벗지 못한 실바나에게 억지로 하나 쥐여주고 자기 손에도 하나 들었다.
“당신 너무 취했는데…….”
“그래서, 안 마실 거야?”
“…마셔야지, 누가 준 건데.”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베로니카가 샴페인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잔끼리 맞닿으며 유리가 진동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끝이 지잉, 하고 함께 울렸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 실바나가 홀린 듯 잔을 빼지도 못하고 굳어 있을 때였다.
“나는 있잖아요, 돈이 있으면…….”
잔에 약하게 남은 루즈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던 베로니카가 한 발짝 다가와 실바나의 목에 팔을 감고 자신의 몸을 기댔다. 실바나가 그 무게를 온전히 지탱하기 위해 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샴페인 잔을 옆 탁자에 올려놓으려는데 잠시를 못 기다리고 말이 이어졌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쨍,
탁자에 놓으려던 잔을 그대로 놓친 탓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깨진 유리가 비산하여 황금색 액체와 섞인 탓에 온 바닥이 반짝거렸다.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 몰라 침을 삼킨 실바나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당신은 어때? 아, 발밑이 끈적거렸다. 한 발짝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달큰한 술의 향기 탓인지 귓가에 와 닿는 숨결 탓인지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겨웠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제게 떠넘겨진 따끈한 몸을 끌어안으니 한층 발이 더 무거워져 이곳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도 그래.”
베로니카는 그런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저 그녀의 대답이 기꺼운 듯 고개를 가까이하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 둘 다 돈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녀는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을 잘 알았다. 실바나의 머릿속에서 깨진 잔이나 흘린 샴페인 따위의 자잘한 생각이 한 순간에 녹아내렸다. 뭐라 항변하고 싶었다. 잘못한 것 없이 억울했다. 그녀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싶었고, 돈을 모을 수 있다고 변명하고 싶었으며, 돈이 없어도 결혼할 수 있다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글을 쓰는 작가로서 수많은 대사를 써왔음에도 수많은 애원과 협박은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개중 무엇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웃으며 실바나의 넥타이를 잡아당겼고, 그에 순종하여 고개를 숙이니 칭찬이라도 하듯 키스를 내려주었다. 그 입술이 너무 달아서 실바나는 목소리를 내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됐었는데도.
“실바나.”
“이제 말도 편하게 하네.”
“같이 술도 마신 사이인데 뭐 어때요?”
“아가씨 마음대로 하시죠.”
“당신이 쓴 책을 읽고 싶어.”
“작가 앞에서 하는 말이 대담하네.”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
“당신이 읽어줘.”
“당신의 역대 애인 중 작가가 없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어.”
실바나는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이불 속에 폭 파묻힌 베로니카를 쳐다보다가 팔만 뻗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책 한 권을 들고 작은 등을 켰다. 겨우 서로의 얼굴만이 보일 정도로 보잘것없는 빛이었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책을 읽어 주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베로니카가 특유의 까만 눈을 반짝이며 실바나의 가슴 위에 얼굴을 얹었다. 숨결이 가깝게 와닿았다.
“…장담하건대, 당신이 내게 이걸 요구하는 유일한 여자일 거야.”
그것도 침대 위에서 말이야, 하는 황당함을 담은 속삭임에 이불을 끌어 올리던 베로니카가 작게 웃었다. 뭐 어때, 여자끼리잖아. 책의 첫 장을 펼치던 실바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의지를 잃었다. 지금까지 맡아온 향수들은 누가 뿌린 거라고 생각한 걸까. 설마 내 소장품이라도 된다고 생각한 건가?
“실바나, 빨리.”
“…그래.”
실바나가 잡생각을 하느라 멈췄던 손을 움직여 기어코 스스로 서문을 펼쳐냈다. 예전에 냈던 책을 인테리어 삼아 올려둔 게 아니라 막 나온 신간의 오자를 확인할 겸 침대 옆에 던져놨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한 번 쉬고 첫 문장을 읽었다. 그러니까, 실바나가 쓴 판타지인지 멜로인지 알 수 없는 장르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온 힘을 다해 부정하려고 애썼다.”
읽는 내내 베로니카는 문장이 너무 시시하다고 토를 달았고, 때때로 정말 당신이 쓴 글이 맞냐고 웃었으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숨을 죽였다. 그리고 20페이지 남짓을 읽었을 즈음에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실바나가 종이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불에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잠들어있는 여자가 보였다. 늘 어딘가 긴장한 채로, 작은 소동물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여자가 지금만큼은 평온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실바나는 조용히 책을 치우고 느리게 책상 등을 껐다.
덕분에 겨우 보이던 얼굴마저 흐릿하게 보였지만 오히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실바나는 더 이상 아무렇게나 써 갈기던 멜로 소설을 이전처럼 쓸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판타지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빌어먹게도, 부잣집 아들과의 결혼이 목표라는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가난한 작가 주제에!
그녀가 쓴 소설 속 주인공도 아주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이런 걸 어떻게 부정하려고 애썼지? 자각하지 못했을 때도 발가락 사이에 낀 돌멩이처럼 거슬리던 것이, 자각하고 나자 피가 자신의 몸을 흐르고 있다는 명제라도 되는 것처럼 확고해졌다. 이런 건 부정하고 싶다고 부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베로니카가 제 가슴에 얼굴을 대고 숨을 내쉰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는 비이성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아, 그녀를 차라리 마녀라고 매도하고 싶었다. 그러면 모두 그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녀는 이제 베로니카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믿지도 않던 신에게 비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신이 아니라 베로니카에게 빌어야 했다. 이제 실바나는 그녀의 숨 하나에 제 심장이 뛰고 멈춘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너무 늦게 찾아온 첫사랑에 심장을 졸이다 늦게 일어난 실바나의 눈앞에 있는 것은 텅 빈 방이었다.
현실은 소설과 달랐다. 사랑을 고백하는 말이 누군가에겐 시작이고 누군가에겐 끝이었다. 실바나의 패착은 그걸 몰랐다는 것에 있었다. 덕분에 공허한 방 안이 허탈한 숨소리로 가득 찰 때까지, 첫사랑이 시작하자마자 끝난 여자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