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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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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101분

#로맨스 #코미디 #판타지

12월 28일, 충동적으로 학원도시를 찾아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보낸 모리 타카히사. 그러나 다음 날 눈을 뜬 그는 12월 28일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문득 코 아래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뜨겁고, 농도가 있는 액체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손으로 닦아내고 나서야 코피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나 잠시 훔치는 것만으로는 멈추지 않았으므로 피가 묻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동안에도 흘러내린 피가 손바닥 위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머리가 아프다. 한계 이상으로 능력을 써버린 탓이다. 이런 기분이군. 타카히사는 적극적으로 아직도 흘러내리는 코피나, 두통을 멈춰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계속 무언가에 취한 감각 속에 자신을 버려두었다.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타카히사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방관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가 만든 아수라장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안심이 되는 이유는 어차피 이 모든 일이 없어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이 기묘한 현상을 처음 깨달았을 때 조금은 재미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얼마간은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차라리 꿈이 맞다고 착각할 수 있던 시간들은 즐겁기라도 했다. 모두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꿈 속에서 이 곳이 자각몽이라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은 신과 같지 않은가. 애초에 그가 많은 것에 미련이 없고, 타인의 시선은 그다지 제약이 되지 않으며 그렇게 참고 살지도 않는다는 건 둘째로 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정말 이 곳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각몽이 맞다고 하더라도 깰 수 없다면 낙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때 그의 앞으로 누군가가 섰다. 타카히사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이젠 시야까지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사람 중에 한 명이겠지. 모르는 사람이겠지만 아주 익숙한 얼굴일 것이다. 관심과는 별개로 순수한 빈도의 결과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타카히사는 지친 것이다.

 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하루에.

"어떤 기분인지 말해봐."

 그는 이제 그것이 아주 지겹다. 이 깨끗할 정도의 리셋은 허무하다. 많은 이야기들이 주는 교훈처럼, 그래서 정답처럼 느껴지는 행동을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 다음엔 오답의 차례였다. 운이 좋다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손쉽게 상황을 망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개같은 기분이라고 말해보라고."

 오늘 아침, 또 다시 익숙한 12월 28일의 하루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세일럼 호텔 방의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보이는 모든 사람을 붙잡고 눈을 마주치며 그들의 기억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면 집단 지성이 필요한 법이잖아. 안 그래? 모두가 이 끔찍한 기억을 공유하면 누군가는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겠지. 그는 이것이 마치 혜안인 것처럼 여겼지만, 기실 화풀이에 가깝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내가 뭘 더 해야하는지, 그래야 이 빌어먹을 하루를 멈춰줄 건지 말해봐."

 그러니 이 말은 대답을 갈구하는 것이 아닌, 그저 비난처럼 감정을 쏟아내는 것에 불과하다. 희미한 실루엣은 그의 바로 코앞에 있다. 그 손이 천천히 다가와 피를 닦아내려는 듯 코 밑을 쓸었다. 타카히사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힘도 없어 잠자코 그 감촉을 느꼈다. 만약 이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면…….

"타카히사."

 다시 눈을 뜨는 순간 죽자, 고 생각했다.


 

"오늘은 대체로 큰 추위 없이 온화하고 맑은 하늘이 이어지겠지만, 저녁부터는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며 눈이 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외출을 예정해두신 분들은 따뜻한 옷차림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 소리에 루나웨이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라디오에선 이른 아침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틀라면 멀었다. 겨울의 새벽은 어두웠지만 등을 지고 있는 통창으로부터 도심의 빛이 들어와 희미하게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볼 것도 없이, 익숙한 그녀의 집무실이다. 연말을 맞이하여 끝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업무를 처리하다가 문득 잠이 든 듯 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간을 떠올리면 그렇게 오래 잠든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불편한 자세로 취한 잠으로 은근하게 어깨가 뭉친 기분이 들고, 벗을 겨를도 없었는지 안경에 눌린 콧잔등이 아파왔다. 그러나 짧은 수면이라도 도움이 된 건 확실한 모양이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것 같은 감각과 만족스러운 수면에서 깨어난 직후의 개운함이 동시에 마구잡이로 섞였다. 그 기분은 알 수 없는 부유감을 준다.

 기분 좋은 안심과 스산한 불안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아침도 밤도 아닌, 현실과 꿈 사이에 위치한 경계의 시간.

 그렇기 때문일까.

 이런 새벽이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학원 도시를 떠나 잠시 머물렀던 아지트의 소파에 모로 누워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그녀의 앞으로 누군가가 앉아있다. 그가 바닥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므로, 눈을 뜨는 것만으로 그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남자의 어스름한 실루엣 정도다. 만약 그때 그녀가 현실과 꿈 중 어느 쪽에 조금이라도 치우쳐 있었다면 바로 몸을 일으켰을 것이다. 시야를 가리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고, 반쯤 흘러내린 안경을 벗고 양손을 뻗어 볼을 감싸듯 덮고 그 얼굴을 붙잡았을 것이다. 손에 약한 힘을 주어 끌어당기면 저항없이 얼굴은 따라왔겠지. 그러고나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러나 그때 그녀는 수면에 무력하게 몸을 내어주며 눈을 감았을 뿐이다. 지나간 과거의 순간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이 우주의 대명제였으므로 루나웨이는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건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렇게도 많은 질문을 하게 하다니. 질문은 질문으로 이어지고, 마치 실처럼 서로 엮이고 엉키다가, 풀릴 일도 없이 계속 견고해져서 결국은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만든다. 그러다 종래엔 그것을 정말 알고 싶냐는 자문까지 하게 한다. 그건 아마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일 것이다. 엉킨 실을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엉킨 부분을 잘라내버리면 된다, 는 아주 간단한 해결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오래도록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유보하고 있다.


 

 다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명확한 문제들로 돌아가고 얼마지나지 않아 해가 밝았다. 괜한 상념에 빠져 시간을 빼앗긴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몰두하다보니 어느덧 출근시간이 되었는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비서가 들어왔다. 그는 언제나 들고다니는 서류집과 함께 손바닥 두개를 맞붙인 크기의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익숙한 인사와 함께 들어온 그는 곧장 루나웨이가 앉아있는 책상까지 다가와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루나웨이는 인사를 받으며 책상 위로 놓아진 쇼핑백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비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 살인적인 연말의 업무량을 함께 책임지고 있는 전우의 얼굴은 어제보다 생생했다. 묘한 뿌듯함이 떠올라 있었다.

"선물이에요."

"갑자기 무슨 선물이에요?"

"갑자기가 아니에요. 생일이시잖아요."

"생일?"

"12월 28일. 아니에요?"

"맞긴한데……."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 생각해보면 그런 시기였던 것 같기도 했다.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최근 몇년간 그녀의 개인사를 넘어선 굵직한 일들이 연말에 포진되어있었던 탓에 굳이 생일을 챙긴다는 감각이 조금 무뎌져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워커홀릭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같은 표정을 한 비서는 자신이 들고 왔던 쇼핑백의 귀퉁이를 가볍게 들고 더 루나웨이 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그러자 입구가 벌려져있는 쇼핑백 안으로 포장된 작은 상자가 보였다. 상자의 모양새로 봤을 땐 악세사리같이 보였다.

"요즘 진짜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건 챙기며 살아야죠."

"생각도 못했는데. 고마워요."

"오늘은 이제 시작인걸요, 뭘."

"이제 시작이라뇨?"

"오늘은 이만 들어가세요. 밤도 새면서까지 한 것 같고. 나머지는 저희끼리 할게요."

"쉬어가면서 해서 괜찮아요. 일찍 퇴근하고 쉬면 되죠."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어요. 이미 오늘은 연차 처리에, 루나웨이 씨한텐 연락하지 말라고 공지도 해놨으니까요."

"네?"

"자자, 하루가 짧아요."

 아무래도 오늘을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까지도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생각해준다니 고마운 한편, 대단할 것 없는 연례 행사에 유난을 떠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비서의 계속되는 채근에 작은 쇼핑백을 안고서 일어나자 마음이 바뀔새라 등을 미는 힘이 느껴졌다. 결국 루나웨이는 곤란한 듯 웃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처리가 시급한 일은 새벽 중에 처리를 해두었으니 사실 고집을 부릴 이유도 없었기 때문다. 그녀는 쉽게 무리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까지 우길 정도의 고집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쁠 것도 없지. 제대로 오래 누워 자본 것도 오래 되었으니 하루종일 잔다던가. 그러고보면 밀린 빨래나 청소 같은 것도…….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나가는 동안에도 마주치는 직원들의 생일 축하 인사가 들려왔다. 공지라고 하긴 했지만 어떻게 한거지?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들은 횟수가 열 손가락을 넘어가자 이제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사내 게시판에라도 올린건 아니겠지 싶다가도 정말 올라와 있을 것 같아서 확인하기 두려워질 정도였다.

 민망한 건 뒤로하고, 모두의 축하 같은 것을 받으며 복도를 걷고 있다보니 마치 졸업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정작 학창 시절엔 이런 세세하고 큰 상을 수상이라도 한 것 같은 수의 축하를 받진 않았지만. 마주치는 사람의 수 만큼 쌓여가는 부담으로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하필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퇴근하고 있다보니 복도엔 나와있는 사람이 꽤 많았던 탓에, 이제 시작이라는 비서의 말은 사실 이 뜻인가 싶을 정도였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탈 즈음엔 거의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 거대한 건물은 층마다 학도의 여러 기관들의 사무실이 위치해있어, 이 층만 벗어나면 이 부담스러운 축하의 세례에선 탈출 할 수 있었다.

 곧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게이트를 통과하며 출근하는 직원들과 수많은 방문객들로 혼잡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피하며 대다수의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언제나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풍경이었는데, 루나웨이는 인파의 사이에서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의 곱슬머리는 선명한 붉은 색으로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다. 한 때 남자는 타인에게 기억 될만한 특징을 감추기 위해 검은 색으로 머리를 물들였었는데, 이제와선 또 귀찮아진 모양인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파나 그림자 따위 속에 숨기고 싶어하는 남자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 태생적인 특징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족쇄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건 마치 그런 삶의 방식을 옹호하는 것 같으니까.

 양 손을 외투의 주머니에 넣은 채로 창 밖을 바라보던 타카히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루나웨이가 정확히 이 시간, 이 위치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그는 곧잘 표정을 숨기기 위해 즐겨쓰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바로 그녀를 향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루나웨이는 잠시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타카히사는 미리 약속을 잡고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한 손을 들어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천천히 그녀의 쪽으로 먼저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가벼운 손인사에 적절한 반응을 하지도 못한 채로 다가오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면서 루나웨이는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렸다. 혁명이 끝난 뒤 그는 홀연히 떠났다. 인사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미련이 없는 깔끔한 퇴장이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남자를 그런 복잡한 사정에 휘말리게 한 것엔 자신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으므로 루나웨이는 그 일방적인 끝맺음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인사도 하지 않은 건 너무 했잖아. 떠난다고 하면 붙잡지는 않았을거야. 고작해야 어디로 갈 건지 묻는 정도였겠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전우애의 연장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할 건 없다.

 그녀가 어느 날 밤, 그의 표정을 궁금해 했다고 하더라도. 소중한 것을 가지는 것이 두려워 마지막 순간에 차라리 그것을 버리는 것을 선택하는 남자의 지리멸렬한 버릇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그것이 자신을 상처입히는 것 같았더라도.

 어느샌가 타카히사는 바로 그녀의 앞에 있다. 선글라스를 벗은 그는 바로 어제에도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처럼 태연한 얼굴로 웃었다. 다음에 올 말은 오랜만이네, 라던가 잘 지냈어? 같은 물음이 자연스럽지만 이어진 건 전혀 다른 종류의 말이다.

"배고프지 않아?"

 


 

 두 사람은 출입구에서 가장 떨어진 안쪽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를 하기엔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적당히 들어온 패스트푸드 점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타카히사는 새로 나왔다는 신메뉴의 버거 세트를 시켰다. 루나웨이는 사양했다. 그다지 허기가 지지 않았을 뿐더러 몇 달만에 불쑥 찾아온 남자와 태평하게 햄버거를 먹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몫의 세트를 들고 온 타카히사는 루나웨이의 맞은 편에 앉아 트레이 위로 감자튀김을 쏟고선 끝을 살짝 밀어 테이블의 중앙에 위치시켰다. 기꺼이 나눠먹기라도 하자는 태도에 실소가 나올 것 같았지만 실제로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타카히사는 감내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 시선을 알아챘으면서도 햄버거의 포장을 벗겨 크게 두 입정도를 연속으로 베어 물었다. 배고프다며 데려온 당사자치고는 마치 지루한 일을 의무적으로 해치우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바로 메뉴를 골라서 좋아하는 것인가 했더니, 그다지 맛있게 먹는 눈치도 아니었다. 타카히사는 여전히 미묘한 얼굴로 입안에 있는 음식을 부지런히 씹다가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안 먹어?"

"괜찮아. 별로 안 배고프고."

"맛있는데."

 그러면서 감자튀김 하나를 멋대로 집어 루나웨이의 입에 물려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급습에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감자튀김을 물게 된 루나웨이가 항의의 얼굴을 하자 타카히사는 웃었다. 격의없는 웃음이었다. 그 친근한 징조 하나 만으로 소식도 모르던 몇 개월간의 공백은 단숨에 사라지는 것처럼 일순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물음이 이어졌다.

"잘 지냈어?"

"잘 지냈어. 바쁘기는 하지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타카히사는 어쩐지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조금 내려가고, 소리내지 않은 채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한다. 조금은 지루한 듯, 소용없다는 듯. 그 얼굴은 아주 알기 어렵지만 조금 낙담한 것처럼도 보인다. 낯선 얼굴이었다. 몇 개월의 공백으로 달라졌다 하기엔 어딘가……. 루나웨이는 그것을 파고드는 대신 가볍게 반문했다.

"너는?"

"나이를 먹으면 시간이 더 빨리 간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야. 요즘 내가 그렇거든. 꼭 하루가 10년 같아."

"그건 과장이 너무 심하지 않아?"

"진짜라니까."

"젊게 사네, 타카히사."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그는 웃는다. 원래 이런 식으로 웃었던가. 어쩐지 또 낯선 얼굴이다.

"그래서 시간이 많으니까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좋은 일이 뭔데?"

"횡단보도에서 할머니의 짐을 들어준다던가."

"그런 걸 했다고? 그럼 나쁜 일은?"

"말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내가 체포라도 할까봐?"

"이미 체포도 당했었거든."

"진짜?"

 타카히사는 반쯤 남은 햄버거를 다시 포장지로 감쌌다. 더 먹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마음대로 쏟아놓은 감자튀김이나 콜라는 그다지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 일련의 행동에는 묘한 권태가 스며들어있었다. 몇 달간의 시간으로도 사람은 변할 수 있겠지만, 어쩐지 다르다. 타카히사는 냅킨에 손을 닦으며 남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뱉었다.

"농담이야."

 어느 쪽이? 그러나 물어보진 않았다. 대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기보단,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오늘이 생일이야?"

‘알고 있었네.’

“왜 하필 오늘이냐고 해도.” 

"좋은 일이 하나 쯤 있을 것 같잖아."

"남의 생일에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말을 하는거야?"

"그러게."

 그 순간 불쑥 손이 튀어나와 루나웨이의 양쪽 귀를 덮었다. 거의 동시에 무언가가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타카히사의 등 뒤에서부터 들렸다. 귀를 막아도 들려온 걸 보니 제법 큰 소리였으리라.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를 향했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깨 너머로 향했다. 손님 중 한명이 트레이를 엎지른 모양이었다. 등지고 있는 타카히사에겐 보이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안거지.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을 때 귀를 막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다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타카히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이 다음 스케쥴은 어떻게 돼?"

 



 

"잠깐 집 상태를 확인하고 싶으니까 들어오라고 할 때 까지 밖에서 기다려."

"네에."

어쩌다가 여기까지 데려오고 만거지. 다음 예정을 묻는 질문에 순순히 밀린 집안일을 할 거라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그러나 그 대답을 들은 타카히사는 묘하게 신나보였다. 생일인데 그런 일이나 하냐고 핀잔을 하다가, 애초에 그건 서두에 불과하다는 듯 자신도 데려가달라고 했다. 그때 만큼은 그의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리던 권태가 단숨에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넘어가는게 아니었는데. 오는 중에도 몇 번이나 한 후회를 마지막까지도 떨쳐내지 못한 채로 결국 루나웨이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얌전히 기다리라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군가가 올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손님을 들일만한 상태인지는 먼저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문전박대 당할거라는 상황을 이해했는지 타카히사도 아직까진 협조적인 태도였다. 열린 문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가벼운 손짓을 몇 번 하자 타카히사는 순종적인 태도로 등을 돌렸다.

집 안은 아주 엉망이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치 뱀의 허물처럼 근래 입었던 옷들이 줄지어 복도의 바닥에 떨어진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듣는 사람은 없지만, 어쩐지 변명하자면 요즘은 집에 들어올 때 즈음이면 항상 녹초가 될 정도로 지쳐있었으니까. 루나웨이는 옷가지를 하나씩 주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양호하네."

한가득 옷가지를 품에 안은 채로 뒤를 돌아보자 어떻게 들어왔는지 문 앞에 선 타카히사가 태평하게 감상을 달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온거야."

"다 스킬이 있어."

"설마 평소에 했다는 나쁜 일이 이런거야?"

"진지하게 생각하지마, 오늘은."

"오늘은?"

"생일이잖아."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아직 들어오라는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신발을 벗은 그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흥미롭다는 듯한 눈으로 집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현관을 들어오면 복도가 일자로 펼쳐셔 있고 정면의 끝엔 주방, 왼쪽으로는 화장실이자 세탁실, 오른쪽으로는 각각 거실과 방으로 통하는 문이 달린 구조였다. 루나웨이의 손이 묶여있는 지금을 노려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타카하사는 가장 가까이 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거실로 통하는 문이었다.

"마음대로 들어가지 말라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안고 있던 옷들을 세탁실에 던지듯 넣어두고 따라 들어오니, 타카히사는 거실의 소파 앞에 서서 티셔츠 하나를 들고 있었다. 루나웨이가 실내복이자 잠옷으로 입는 가볍고 조금은 낡은 옷으로 출근하기 전 대충 갈아입고 소파 위에 던져놓고 간 기억이 남아있었다. 유치한 프린팅이 그려진 티셔츠는 아마도 언젠가의 행사의 경품 같은 것으로 받았을 것이다. 밖에 입고 다니기엔 조금 요란한 디자인이었다. 타카히사는 그 티셔츠 안의 알 수 없는 캐릭터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다람쥐처럼 생겼지만, 좀 더 덩치가 크고 공격적으로 보이는 느낌의 도저히 인기가 없을 것 같은 모습의 캐릭터였다.

"네 잠옷 꽤 귀엽네."

"…조용히 해."

 루나웨이는 타카히사의 손에서 남은 티셔츠를 뺏어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내쫓겠다는 경고 후에야 타카히사를 얌전히 소파에 앉아있도록 할 수 있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생각으로 가득해보이긴 했지만 일단 그 말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반려견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산책으로 힘을 빼놔야 집에서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아졌다. 대신 입까지 막게 하는 것은 무리였는지 베란다에서 널어놓았던 마른 수건들을 걷어 돌아오는 그녀를 향해 소파의 한쪽 팔걸이에 턱을 괸 채로 말을 계속 걸어왔다.

“진짜 청소 해줄 수 있어. 나 심지어 잘해.”

 잘한다고? 어쩐지 반발심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기분이 조금 들었지만 너무 뻔한 도발엔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됐어. 청소해주려고 온 거 아니잖아."

"못해줄 건 없지."

 대꾸 대신 걷어온 수건 등을 식탁의 위로 쏟아놓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수건 두어개를 개고 몸을 살짝 틀어 돌아보니 모로 누워있는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전혀 할 의욕 없잖아. 각도 때문인지 잘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있잖아, 타카히사.”

“응.”

“정말로 왜 온거야?”

“…….”

“뭔가 도움이 필요한거라면….”

“도움이라.”

 그가 무언가를 들고 있던 손을 내린 덕분에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볼 수 있었다. 손 하나 크기 정도의 종이 박스. 선물로 받았던 악세사리의 상자다. 들어오는 길 현관 수납장 위에 두고 온 것을 들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겉을 묶어놓은 리본은 풀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는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눈치였다.

“왜 온거냐는 말은 조금 이상해.”

“어디가?”

“질문이 틀린 느낌.”

“그럼 맞는 질문은 뭔데?”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침묵이 이어졌다. 아마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것은 질문이 아니다. 이상한 건 그였다. 루나웨이는 각을 맞춰놓은 수건을 쌓아두고 일어나 소파에 걸어갔다. 바로 그 정수리의 앞까지 가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천장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던 타카히사는 눈만 돌려 머리 바로 위의 루나웨이를 쳐다보았다.

“모르겠어.”

“모르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궁금한게 있어.”

“뭔데?”

“내 문제가 뭐라고 생각해?”

“지금 이런 점.”

 즉답이다. 문제라면 얼마든지 있다.

“불쑥 찾아오거나, 남의 집을 멋대로 돌아다니기나 하고. 왜 그러는지는 하나도 말해주지 않는 거.”

“괜히 물어봤나.”

“솔직하게 말하면 큰일이 날 것처럼 구는 점도.”

 그가 본질에서 떨어진 이야기만 하고, 그 정도의 관계만 만들어가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까. 마음이 내키면 멋대로 침범해놓고 그 마음이 식어버리면 미련도 없이 떠나버린다. 남겨진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태도는 자신이 그 정도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또한 염두하고 있지 않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품어버린 사람만이 그 부조리함을 견디며 살아야한다.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거야.”

“뭐든지?”

“그건 들어보고.”

 진심이었지만, 대답이 재미있었는지 타카히사가 소리내며 웃었다. 누워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의 웃음소리는 평소의 목소리보다는 조금 낮게 들렸다. 눈썹은 조금 내리고 곤란한 듯이 웃는 얼굴이다. 아, 이런 표정을 언젠가 본 것만 같다. 그것이 언제의 일이었는지 루나웨이는 막연하게 깨달았다. 가끔 어떤 깨달음의 순간은 개인의 인식을 넘어 타인과 공유된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

“… ….”

“말해도 돼.”

 

 이젠 횟수를 세는 것조차 포기한 어느 12월 28일의 아침이 다시 밝았을 때, 타카히사는 마치 더없이 익숙하고 정해진 일과를 처리하는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호텔을 빠져나와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의 앞으로 몸을 던졌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끔찍하게 아팠으므로 그는 다음엔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했다. 그 또한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편안한 죽음을 고찰하는 행위는 그가 이런 저주에 걸린 이후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고통을 끝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는데 이래서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진정한 천국이라는 곳은 없는 것일까.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삶을 원했던 것은 그의 오랜 욕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삶이 이젠 더없이 끔찍하다.

 그러고나자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운 자세 그대로 그는 루나웨이를 올려다보았다. 질책과 걱정이 함께 떠올라있는 얼굴이다. 그 때 내 이름을 부른 건 너야? 무엇이든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그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타카히사의 머릿속에만 남아있었으므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싶다. 그녀는 대부분의 문제의 정답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지금까지 해온 헛짓거리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제안을 해올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을 것이 두렵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타카히사는 왜 자신의 하루가 반복되고 있는지에 대해 오래 골몰하였다. 하지만 그건 틀린 접근이었다. 그러니 틀린 방법만 선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이 도시에 루나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다시 이 곳에 올 마음이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주 먼 과거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오래 잊고 있었다. 사실 그 또한 오랜 외면이었을 뿐을, 쓸모없는 저항의 연장이었다는 것을 이젠 알고 있다.

 어째서 자유로운 삶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은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 앞에선 이렇게 초라해지는 걸까.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오답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걸까. 오답같은 삶엔 진저리가 날만큼 익숙한데도…….

“가지 말라고 말해봐.”

“왜?”

“…….”

“왜?”

“내가,”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응.”

“널 사랑하니까.”

“…….”

“…….”

“타카히사는 정말 바보네.”

“들어보니 역시 별로야?”

“말할 내용이 틀린 느낌.”

“맞는 말은 뭔데?”

“곁에 있어달라고 말해봐.”

 타카히사는 손을 뻗는다. 그 손의 높이에 맞춰 루나웨이가 고개를 살짝 숙여준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귓볼에 닿았다. 상처가 없는 부드럽고 연약한 살을 지긋이 누른다. 약간 긴장한 듯 어깨가 조금 경직되었지만 피하지는 않는다. 그는 마지막 주문을 입에 담는다. 

 비로소 저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스틸컷

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01-2.png

슈에 루나웨이

薛 矑娜暐

홍짱, 자룡

01-1.png

모리 타카히사

森 孝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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