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딱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서로 다시 만날 일은 없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햇빛을 즐기세요. 안개가 다시 끼기 전에.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후딱 갑니다. 즐기세요, 마음을 열고. 지금 사랑하자고요.
만추(2011)
* * *
시애틀의 햇살은 붙잡히지 않는다. 구름과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선명한 그림자를 남겼던 태양은 두 사람이 강을 건너는 사이 회색빛 하늘에 잡아먹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방울은 아직 돌바닥 대신 공기를 적셨으나 곧 소나기가 쏟아질 듯했다.
“비가 올지도 모르겠어.”
“일기예보라도 봤어요?”
“온종일 변덕스러운 것 같길래.”
세리나가 얇은 겉옷을 여몄다. 애매한 대명사는 날씨를 지칭하고 있을 게 뻔했으나 하필 고른 단어가 사람에게 더 자주 쓰이는 종류였다. 서툰 영어 실력 탓임을 짐작하면서도 한번 곱씹고 마는 이유는 분명했다. 세리나는 결론을 내는 대신 입꼬리만 당겨 웃었고, 막 닫힌 문을 잡아 열어둔 쥰은 실내 온도계를 읽고 있었다.
“61도, 그러니까…….”
그는 몇 시간 후면 더 추워질지도 모른다는 걸 이유 삼아 다음 장소를 제시할 계획이었다. 특유의 무딤은 가끔 객관적인 숫자를 근거로 끌어와야 제 기능을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아직 미국식 표기에 익숙해지지 못한 도망자는 예상치 못한 난관을 조우했다.
“덥단 건지 춥단 건지 헷갈리네.”
“흐음.”
“그래도 비가 오든, 해가 지고 나서든 더 추워지겠지.”
“섭씨로는 16도 정도예요.”
느리게 알려준 정답은 변덕이 아니었다. 영업 종료 안내판으로 입구를 막아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세리나가 비소했다.
“새삼스럽지만 당신, 시애틀을 잘 모르죠.”
“…….”
“가이드를 자처하더니.”
“길을 잘 찾는다고만 했어.”
예기 서린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맺히자마자 쥰은 세리나를 돌아봤다. 고작 한 사람의 눈을 낯설어하기엔 세리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진절머리 나게 익숙했다. 그러니 아마 햇빛 탓일 터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열린 문을 통해 선선해진 바깥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목이 타는 사람이 수통을 건네받은 것처럼 성급하게 들숨을 삼켰다. 쥰은 생각했다. 공기에서 무게가 느껴지는 건 단순히 시애틀의 날씨 탓이 아니었다. 웃는 얼굴을 포착하면 숨길 거라고 예상했다. 나름대로 근거 있는 짐작이었다. 그러나 세리나는 시선이 교차한 것을 깨닫더니만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부러 눈을 접고 자연스럽게 입 끄트머리를 당겨 올렸다. 부드럽다 못해 우아하기까지 한 미소가 마주한 이를 향했다.
“수작을 부리는 거치곤 비효율적이야.”
세리나는 쥰이 한 번 실패했던 장면을 흉내 내는 것처럼 손을 뻗어 그의 목에 감았다. 도망쳐 나온 휴가가 길었다. 손등에 닿는 빳빳한 인조 가죽에는 흡수되지도 못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쥰은 그의 손을 거부하던 백색 눈을 떠올렸다.
“또 이런 식이지. 놀리는 거라면 곤란한데.”
“신기해서 그래요. 이렇게까지 날 원해요?”
떠넘긴 시계 탓에 손목이 무거웠다. 쥰이 시곗줄 위로 세리나의 손목과 손을 함께 잡았다. 살갗 위로 차가운 금속이 눌렸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시간을 내어주길 바랐을 뿐이라고 한다면?”
“믿으면 뭐가 달라질까요…….”
“지금 우린 가까이 있어. 어쩌면 아까 그 호텔방에서보다도 더.”
“그러네요.”
“아직도 불편한가.”
“불편하지 않을 리가.”
대답을 듣자마자 쥰은 아주 미미하게 얼굴을 굳혔다. 다른 손으로 흘러내리는 넥타이를 틀어쥔 세리나가 그를 가벼이 잡아당겼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두 사람의 행동엔 소리를 덧입혀줄 염탐꾼조차 없다.
세리나의 입술이 벌어졌다. 느리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전해지는 문장은 세찬 바람에 약간의 틈만 허용해도 음소가 되어 흩날렸다. 당기는 힘 이상으로 쥰이 고개를 숙였다. 드러난 이마 위로 세리나의 머리카락이 스쳤다. 바람의 방향이 뒤집혔다. 웃자란 머리카락이 세리나의 뺨에 닿았다.
어떤 찰나는 다음 계절을 기약했다. 기약은 이별을 전제로 했다. 세리나가 아는 만큼, 쥰 역시 알았다. 다만, 당장은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