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리에게.
나는 말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라서 오랜만에 편지를 썼을 때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어.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늘지 않는 것도 있나봐. 노력해본 적도 있었지만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재주는 안 생겼어. 결국 특별한 인사는 떠올리지 못해서 그냥 평범한 말로 시작할게.
잘 지냈어?
“에…… 에, 에취!”
재채기를 하자 눈앞이 흔들거렸다. 코끝을 문지른 케이結는 조금 훌쩍거렸다. 홀로 숙소를 나서 걷는 길. 잠깐 그쳤던 눈은 어느새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길 양 옆으로는 생전 처음 보는 높이로 눈이 쌓여 있었다. 종종걸음치던 케이는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멍하니 눈 더미를 바라보았다.
‘눈이다…….’
여행의 묘미란 본래 살던 곳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을 마주하는 일이다. 바다를 건넌 것도 아니고 도쿄에서 홋카이도로 왔을 뿐이지만,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케이에게는 인생 첫 여행이었다.
단 둘이서 졸업여행을 가자고 한 날, 케이는 어디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마음 속에 정해둔 여행지가 있었다. 아무데나 괜찮아, 가 아니라 여기가 아니면 안 돼, 였다. 하지만 강경하게 말하면 속내를 들킬 것 같아 터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돌려 말하며 은근슬쩍 의견을 피력한 끝에 케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애초에 케이의 동행인은 여행지를 정하는 데에 그다지 의욕이 없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럴듯하게 구색을 갖춘 여행지 목록에서 케이가 굳이 오타루를 골라냈을 때, 그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말이 없다가 짧게 입을 열었다.
오타루……
그래. 그렇게 할까.
싱거운 답변이었다. 케이는 안도하면서도 맥이 탁 풀리는 감각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게 불안하기도 했다. 결국 케이는 오타루의 운하와 거리, 오르골과 유리 공방 같은 관광지를 줄줄 읊으며 자신이 얼마나 타당한 선택을 했는지 입증하려 애썼다.
노력은 가상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던 것 같다. 열띤 해명에도 케이의 동행인, 칸자카 이리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칸자카 이리는 칸자카 케이의 하나뿐인 가족이자 어머니였다. 두 사람은 판에 박은 듯이 닮아서 거리를 걸으면 누구도 모녀임을 의심하는 법이 없었다. 눈처럼 흰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치켜올라간 눈매와 드러난 송곳니까지. 구석구석을 살펴볼수록 닮은 구석은 늘어나기만 했다.
두 사람이 닮은 건 외모 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습관이며 말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식사를 할 때 가장 먼저 집는 반찬까지 비슷했다. 태어날 때부터 쭉 자라는 순간순간마다 누군가와 공통점을 찾는다면 자연히 알게 된다. 칸자카 케이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칸자카 이리와 닮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게 진실이라는 점에서 케이는 약간 방자해졌다. 나와 엄마는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비슷해. 그러니까 내가 엄마에 대해 모르는 건 없어. 설령 모르는 게 있더라도, 내 머리로 곰곰이 생각한 결론이 엄마가 내린 결론과 같을 게 분명하잖아?
평생을 가지고 있던 오만이 깨진 건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잘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이 마음이 진짜인지도 오래 고민했었는데 진짜인 것 같아. 네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자주 생각했거든. 지금의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가까이 있어서, 서로밖에 없어서 없으면 못 살 것처럼 느껴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서 살아봐야 한다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했었지.
그 편지는 꾸밈도 없는 밋밋한 봉투에 덜렁 담겨 왔다. 수신인은 칸자카 이리. 발신인에 적힌 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케이는 그 우편물을 숨겨 버렸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보다 묘한 고양감이 앞섰다.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온 케이는 편지를 조심스레 뜯어보았다.
어쩌면 이리의 말이 맞았을지도 몰라. 이리는 떠났고 정말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나도 머물러 있지는 않았어. 내키는 대로 멀리 가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어. 이사도 많이 다녀서 가지고 다니는 짐이 별로 없을 정도.
편지봉투만큼이나 간소한 편지지에 빼곡하게 눌러쓴 글자들.
그래도 나는 항상 이리 생각을 했어. 새로운 곳에 갈 때도, 익숙한 장소로 돌아올 때도.
잊어버리지 않기로, 내가 기억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 안에는 칸자카 케이가 모르는 칸자카 이리가 들어 있었다.
“여, 여기 맞겠지? 지도는 여기라고 하고, 길도 외웠으니까 틀림없을 거야….”
케이가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타루는 워낙 작아서 위치만 잘 잡으면 대부분의 관광지를 걸어서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케이는 관광지와의 거리보다 다른 걸 더 신경써서 숙소를 잡았다. 두 사람이 묵는 게스트하우스는 오타루의 중심지와도 멀지 않지만, 교묘하게 편지의 발신지와 가까운 위치였다. 이쯤 되면 칸자카 케이가 왜 오타루를 고집했는가도 명확해진다. 연신 핸드폰을 쳐다보던 케이가 눈을 들어 명패를 보고 아, 소리를 냈다.
모모하라 모모하百原 百葉.
편지봉투에 써 있던 이름이 그대로 명패에 적혀 있었다. 명패의 이름은 하나뿐이었고 집도 아주 작아 보였다. 혼자 사는 걸까? 초인종을 눌러야 할까? 편지 하나를 쫓아서 무작정 오타루까지 왔지만 막상 문앞에 서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모모하라 씨와 얼굴을 마주하면 뭐부터 얘기해야 할까. 실례합니다, 저희 엄마한테 편지하셨죠? 아니면 안녕하세요, 칸자카 케이입니다? 어떤 말로 시작해도 이상할 것 같았다.
“……모르겠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칸자카 이리도, 지금의 칸자카 케이도 그런 성격이 아니다. 케이는 눈을 질끈 감고 초인종을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초인종이 빽 울었다. 큰 소리가 공기를 휘저었지만 그뿐이었다. 안쪽에선 좀처럼 사람이 나올 기미가 없었다. 한 번 더 눌러봐야 하나? 케이는 고심하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러보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놀러 온 거야?”
“응?”
통통 튀는 목소리가 주의를 잡아끌었다. 케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손은 초인종 위에 있었지만 정신은 다소 얼빠진 채였다.
“어…….”
“거기 우리 집이거든.”
“여기가 너희 집이라고?”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건 케이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푸른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묶은 소녀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케이를 보고 있었다. 나이는 비슷해 보였지만 키는 케이보다 제법 작아서 자연스레 시선이 내려갔다. 양뺨과 코끝이 빨갛게 물든 소녀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응! 우리 집. 어디서 온 손님이야?”
“나, 나는… 도쿄에서.”
“도쿄!? 멀다! 나도 도쿄에서 살았었는데!”
“원래 여기서 안 살았어?”
“응, 이사 엄청 많이 다녔거든. 그래서 집에 짐이 하나도 없어!”
여전히 발랄한 투였다. 케이는 문득 그 문장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기시감에 빠졌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에 잠긴 건 아주 잠시뿐이었는데도 어느새 손이 잡혀 있었다.
“놀러 온 거면 같이 놀자!”
“아니, 나는 놀러온 게…….”
뭐라 할 틈도 없이 소녀가 케이의 손을 당겨 한쪽으로 이끌었다. 케이의 항변은 끝맺어지지 못한 채 겨울 공기를 떠돌았다. 생각해보니 소녀에게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낯선 사람이란 거 이제 생각해보니 너무 수상하잖아? 명패에 쓰인 이름이 하나뿐이었다 해도 다른 가족이나 동거인이 함께 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 거기가 자기 집이라는 소녀의 말이 의심스럽지는 않았다. 그 사이 소녀는 눈밭을 가로질러 앙상한 나무와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는 평지까지 다다랐다.
“홋카이도에 처음 왔을 때, 눈이 엄청 많이 와서 놀랐어!”
소녀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꼭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어쩐지 마음이 조금 편해진 케이가 가볍게 답했다.
“나도. 내 키보다 높이 쌓인 눈을 보는 거, 처음이야…….”
“나도, 나도! 신기해서 처음 봤을 때 푹 파묻혀 보기도 했어!”
“그, 그래도 돼……?”
“괜찮아! 난 건강하니까. 한 번도 감기 걸려본 적 없는 걸.”
“대단하다…….”
순수하게 감탄하자 소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얼굴을 보자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타루는 졸업 여행으로 온 거긴 한데.”
“졸업? 중학교? 졸업 축하해!”
“고마워, 학기말도 보내야 하고 졸업은 아직 한참 남았지만.”
“졸업 여행은 친구들하고 왔어?”
“아니, 친구들끼리 이렇게 멀리 여행 오는 건 아직 힘드니까… 엄마하고 같이.”
“그래? 나는 친구들하고 많이 다녔는데!”
“……어른들하고 같이 안 가고?”
“응! 우리끼리만.”
소녀가 쾌활하게 답하고 덧붙였다.
“우리뿐이었으니까, 우리끼리 이것도 저것도 전부 했어.”
“그렇구나…….”
케이는 또다시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잘은 몰라도 왠지 중요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순간적인 감각이 빠져나가기 전에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
“근데 여행으로만 온 건 아니야.”
“그러면? 뭐 다른 거 하러 온 거야? 궁금해!”
“음, 사람을 찾으려고.”
“사람?”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남은 한 손을 팔랑거리던 소녀가 머리를 기울였다. 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아까 너희 집이라고 했던 곳… 모모하라 씨를 만나러 간 거야.”
“모모하라.”
소녀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되풀이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왜 찾아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답하기 쉬운 질문이었다. 케이는 약간 안도하며 답했다.
“집에 편지가 왔는데 모모하라 씨가 보낸 거라서.”
“편지가 왔는데, 편지를 보내지 않고 직접 찾아 온 거구나?”
“……그,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이상한 생각으로 온 거 아냐!”
장난기 어린 투에 말려들어간 케이가 손사래치자 소녀가 한참을 웃었다. 이어지는 물음은 당연히 ‘그러면 왜?’일 것이다. 소녀가 묻기 전에 케이가 먼저 답했다.
“사실 나한테 온 편지가 아니라 우리 엄마한테 온 편지거든.”
“…….”
“엄마 편지를 보는 거 좀 그렇지만, 왠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케이에게?”
“나한테도 그렇고 엄마한테도 그렇고.”
케이가 순순히 긍정했다.
“그대로 엄마한테 전하면 나한테는 알려주지 않고 그냥 사라질 것 같았어. 엄마는 나한테 별로 숨기는 거 없긴 한데, 왠지 이건 물어봐도 얘기 안 해줄 것 같은 느낌이라서. ……딱히 근거 같은 건 없으니까 아닐 수도 있지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구나.”
소녀는 케이의 말에 반박하지도, 그건 잘못된 행동이라고 꾸짖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란 것 같은 얼굴로 케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며 케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엄마하고 나는 엄청 비슷한 성격이거든.”
“그래?”
“응. 서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근데 이건 딱 하나 내가 모르는 거야.”
“…….”
“사실은 엄마하고 나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건 당연한 거긴 하지만…… 그냥, 엄마한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알고 싶어졌어.”
천진난만한 동일시가 늘 좋기만 한 건 아니지만. 타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감각을 좀 더 긴밀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다. 그리고 가느다란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엄마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분명 중요한 일일 거라고.
“케이는 엄마 엄청 좋아하는구나?”
“뭐, 둘이 살기도 하고. 나는 엄마하고 닮았으니까 좀 더 그렇지. 그러는 너는… 아, 계속 너라고 부르는 것도 좀 그렇네. 넌 이름이…….”
뭐야? 라고 물으려던 순간. 겹겹이 쌓여있던 기시감 속에서 날카로운 위화감이 툭 튀어나왔다. 도저히 눈을 돌릴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케이를 마주보고 있었다.
“……있지.”
“응.”
“나, 너한테 이름 안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내 이름을, 케이라고…….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조금 떨면서도, 케이는 소녀에게 잡힌 손을 빼지 않았다. 떨리는 건 무서워서나 화나서가 아니었으니까. 그냥 조금 추웠을 뿐이다. 소녀에게서 악의나 모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아주 익숙한, 그래서 조금 반갑게까지 느껴지는 기색이 있었다. 푸른 머리칼에 동그란 눈. 시종일관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외치던 소녀는 어느샌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케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네. 그래도 알고 있어.”
“어떻게?”
“지어줬으니까.”
“…….”
“그 편지, 지금 가지고 있어?”
그 말에 케이는 불현듯 깨달았다. 깨달은 순간, 잡혀 있었던 손의 온기가 사라졌다. 사실 온기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혼자 허허벌판에 서 있었으니 유달리 추울 수밖에. 케이는 몸을 휙 돌려 뒤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예상했던 대로 흰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서 있었다. 당장 눈에 뒤섞인대도 어색하지 않을 얼굴에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가 둘.
“……엄마.”
“가지고 왔어?”
칸자카 이리가 조금 웃는 얼굴로 딸에게 물었다.
칸자카 모녀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빼다 박았다.
그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칸자카 케이에게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이리의 재능은 피를 타고 흐르며 약간 다른 방향으로 유전되었다. 이리가 자신의 머릿속에 도서관을 만든다면 케이는 그걸 꺼내 읽어볼 수 있었다. 아직 어리고 재능을 발휘할 일도 그다지 많지 않은 케이는 조절에 서툴러서 이따금씩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리의 머릿속에 있는 책 한 권을 읽어버린 것이다. 그건 분명.
“……아까 그거, 모모하라 씨… 인 거지?”
칸자카 이리의 머릿속에 있는 모모하라 모모하.
이리는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아. 케이는 품 속에서 흰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리는 봉투를 받더니 가만히 그 위에 쓰인 이름을 바라보았다.
“맞아. 모모하야.”
“엄마가 따라오고 있는 줄 몰랐어! 진짜야. 난 정말 여기서 만난 친구인 줄 알고.”
“어땠어?”
“……어?”
케이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자 이리가 한 번 더 물었다.
“모모하, 어떤 애인 거 같았어?”
케이는 아직 조금 더 변명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 대신 솔직하게 답했다.
“엄청 밝고, 시끄럽고, 재밌고…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아.”
“그래?”
“응. 그리고…….”
잠깐 공중에 떴던 말끝은 곧 돌아왔다.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았어.”
“…….”
무엇을, 이라고는 케이도 말하지 않았고 이리도 묻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오랫동안 체감해 온 공통점이 있다. 굳이 말로 꺼내어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건 잊어버리지 않았으니까.”
난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책들 속에서도. 숨바꼭질을 하던 날들은 기억하고 있다. 편지 봉투를 든 이리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기 오자고 했구나.”
“미안…….”
“미안할 건 없지만.”
이리가 여전히 봉투를 열지 않은 채로 끝만 쳐다보다가 말했다.
“여기에 있는 거네.”
이 봉투 안쪽에. 그리고 조금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모모하가 있다.
이리가 잠시 시선을 멈춘 동안 케이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잘못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엄마의 우편물을 말도 안 하고 숨겼고, 그걸 뜯어서 읽어 봤고, 졸업여행을 핑계로 그 편지를 쓴 사람을 찾으러 왔고, 또 그걸 엄마한테 비밀로 하고 혼자서 나왔고……. 이리가 엄격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라면 꾸중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리는 케이가 한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망설이는 것처럼. 혹은 준비가 오래 필요한 것처럼 봉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열었을 뿐이다.
편지가 손 끝으로 끌려나오고, 이내 이리의 시선이 글자에 닿았다.
이리가 말없이 편지를 읽었다.
지금 있는 오타루는 겨울마다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야.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해. 나는 이리를 잘 아는 편이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으니까. 어쩌면 이리도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조용히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면 이리도 여길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아는 이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을까봐 겁도 나.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난 언제나 기다리고 있어.
언제나 너를 생각해.
왜냐하면 나의 이별은 너에 대한 사랑의 실험이었으니까.
나는 이리와 헤어지고 싶어서 떠나보낸 게 아니야. 언젠가는 다시 만나고 싶어서 떠나게 뒀어. 아주 먼 미래,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라도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우리가 헤어져 있던 시간과 떨어진 채 한 경험들이 모두 하나의 증명으로 통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 생각은 지금도 같아. 백 년 후에 묻더라도 같을 거야.
이리는 어때?
대답을 듣고 싶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도 좋아.
이리가 편지를 마저 읽는 동안 케이는 얌전히 기다렸다. 마침내 이리의 시선이 떨어지자 케이는 약간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주소, 여기 바로 근처야. 걸어서 갈 수 있어. 아까 초인종을 눌렀을 때는 아무도 없긴 했지만 지금은 돌아왔을지도 몰라.”
“…….”
“가볼래?”
이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케이는 이리가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봤다. 조금 골머리를 앓더라도 늘 금방금방 결정해 왔는데.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런 모습을 보여왔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케이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엄마에 대해 모르는 단 한 가지. 그 부분에 얽히면, 엄마는 나와 아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내리는 눈. 오래된 실험. 증명되지 못한 사랑.
그 모든 것의 종지부가 지금 이 오타루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