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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엔젤

City of Ang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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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114분

#멜로 #드라마 #판타지

1920년대 뉴욕.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던 천사, 테오는 어느 날 우연히 지친 얼굴의 건축가, 에드워드 노턴과 마주치게 되는데…….

테오는 정면을 바라보고 섰다. 하늘이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곧 그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약 이백 미터 아래로 빗물에 젖은 뉴욕의 뒷골목 바닥이 내려다보였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오금이 저리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었겠지만, 테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그에게는 추락의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건물 옥상과 도로 사이의 이백 미터 간격은 그에게도 의미가 있는 수치였다.

그는 스스로 이곳에 올라오기를 선택했다. 오래전부터 지속해 온 일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이 시원섭섭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다른 개체들과 다르게 상당히 충동적으로 이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을 후회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더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처음 마주쳤던 날처럼 그 남자가 이 건물의 옥상 문을 열고 나온다. 그는 지금의 자신을 볼 수 없을 테지만, 테오가 그러기를 선택만 한다면 얼마든지 보여질 수 있다. 그러면 남자는 놀란 얼굴을 할 것이다. 그는 남자가 급히 다가와서 자신의 팔을 잡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상상 속의 남자가 입을 연다.

“신중하게 생각하자.”

“기회는 한 번뿐이야. 저지르고 나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남자는 그가 곧 잃어버리게 될 것들을 헤아릴 것이다. 천사와 인간의 차이를 하나하나 생각하고 이야기하면서, 그에게 재고할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그 망설임과 고뇌까지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자산이다. 테오에게는 상실을 향한 두려움이 없다. 그 때문에 천사들의 선택은 대부분 실리적이다.

테오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이곳에 왔다. 다만 이 선택이 그만큼 간단하게 결정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모든 각오에는 계기가 있다. 천사가 천사답지 않은, 그럼에도 천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거든 그만한 각오가 선행되게 마련이다.


 


 

“테오?”

“응.”

“뭐 보고 있었어?”

에드워드의 작은 방에는 손님이 와서 앉을 만한 변변한 의자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옮겨 테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침대에 앉아서 앞쪽에 위치한 창을 바라보았다. 운 좋게 얻은 이층집이라지만, 지대가 낮은 곳에 세워진 집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주변의 탁한 시멘트 건물과 매연이 전부다. 그나마 저 멀리 건물 뒤편으로 고가 철도가 지나가는 철로가 창 끝에 걸쳐 있었으나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음. 전망이 좋지는 않지? 그래도 눈 내리는 날은 좀 나은데.”

낮에도 해가 잘 안 들어와서 좀, 그렇게 말하면서 에드워드는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사실 에드워드가 이 자리에 오는 것만으로는 테오가 뭘 보고 있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창 앞에 선 에드워드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천사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방은 방음 안 되는 벽 너머로 집주인이 프라이팬을 향해 고함 치는 소리와 창밖으로 들려오는 행인들의 웃음소리나 침투하는 곳이었다. 테오의 입은 가만히 다물려있다.

테오는 에드워드가 잠깐 동안 이 집을 겨우 발견해서 계약했던 날을 떠올리는 목소리를 듣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은 거 아닌가.”

그의 말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아까부터 장터에 내놓은 헌 물건을 어떻게든 팔아야 하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더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 그는 해안가에서 주워 든, 복잡하게 생긴 소라 껍데기를 손에 쥔 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때와는 다른 얼굴이라고 테오는 생각한다. 그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테오는 몸을 기울였다. 그를 처음 본 날, 에드워드는 삶에 지친 사람들이 짓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를 만난 건 스펜서 빌딩의 옥상으로, 그 빌딩은 이곳보다 서쪽에 위치한 매우 높은 건물이었다. 그곳은 한때 상류층의 구역에 속해있었으나 슬럼가가 확장되면서 그 명예를 잃은 빌딩으로, 부유와 빈곤의 경계에 서 있었다. 건물의 서쪽에서는 거액의 거래가 매일 이루어지고 마천루 경쟁에 불이 붙었다면,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어둡고 그늘진 곳에 몸을 숨긴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부터는 빌딩 옥상에 올라오는 사람도 없어져, 테오는 그곳의 옥상 난간에 앉아 조용히 뉴욕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때로는 이본이 함께했으나 그날은 혼자였다.

바로 그날, 한 남자가 옥상을 방문한 것이다. 안경을 쓴 금발의 백인 남성은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팔을 꿰고 있는 재킷이나 와이셔츠가 그렇게 고급스러운 물건은 아니었다. 그는 테오가 앉아 있는 난간 가까이 걸어왔다. 눈을 반쯤 뜨고 굳건히 입을 다문 표정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에드워드는 태양도 도로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높은 건물들의 꼭대기였다. 아래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

바로 전날, 백만장자의 파티에서 뉴욕의 수없이 많은 가십과 인간의 욕망을 듣다 온 테오는 높직한 고도에서 조용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건물은 47층이지, 187미터의. 그럼 그 옆의 건물은 한 35층쯤 될까. 38층?’

그는 옥상의 바람을 맞으면서 높게 솟은 건물들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자신이 잃은 것이 아주 특별한 상실은 아니며, 이 모든 일은 결국 지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다시 옥상을 내려갔다. 그때쯤, 테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따라갔다. 그를 알기 위해서였다.

“저, 저기.”

테오의 눈 바로 앞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긴 속눈썹이 에드워드의 안경테에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에드워드는 최대한 몸을 뒤로 기울이고선 당황한 얼굴로 테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더 에드워드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도로 몸을 들었다.

“방금 뭐한 거야?”

“당신, 고민 있지.”

“응?”

“말해봐.”

갑작스럽잖아, 에드워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런 건 없다고 간단히 대답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어느새 테오가 얼굴을 가까이 한 기행은 뒷전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가 전부 테오의 노림수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에드워드의 고민을 직접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자신이 쫓아가서 본 것들을, 에드워드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그에게서 직접.

‘없어.’

불현듯 이본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린다.

테오가 눈을 떴다.

 

 


 

테오는 떨어지고 있었다. 높은 건물 사이의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다. 그는 눈을 뜨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시야를 확인한다.

‘그러게 내가 말렸잖아. 넌 지금 주마등을 보고 있는 거야.’

에드워드라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오는 천사의 추락을 인간들의 상상처럼 죽음과 동일한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그들은 빛의 빠르기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인간의 수백 배에 달하는 속도로 사고할 수 있었다. 테오는 회상하고 있었다. 발을 내디딘 것도, 최근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도 전부 자신의 선택이다.

없다고, 그렇게 말한 건 테오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천사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창백한 피부의 천사는 이곳으로부터 서쪽, 여러 천사들이 오가는 그곳─뉴욕 공립 도서관의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에 서서 테오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오는 이본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말이야.”

이곳에서 테오와 시선이 마주치는 건 그와 같은 천사들뿐이다.

“사람 한 명한테 눈길이 간 적 있어?”

“이상한 걸 묻는구나. 늘 하는 일 아니니.”

“그건 그렇지만.”

이본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테오는 예상 그대로의 답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서는 자주 할 말을 잃게 된다. 이본은 다분히 천사다운 일을 하는 천사다. 스스로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앞에서는 더 자주 그런 기분을 가지게 된다고 느끼곤 한다.

“그걸 벗어나서.”

“없어.”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고 테오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벼락부자가 된 남자, 클럽에서 매일 밤 노래를 부르는 가수, 도박으로 하룻밤에 전 재산을 잃은 노름꾼, 입원한 손녀에게 줄 모자를 뜨는 노부인.

그러는 동안 사람의 곁에서 또 다른 사람의 곁으로 향하는 사이의 공백에 그의 하루를 채우는 건 늘 에드워드에 관한 생각이었다.

테오는 에드워드를 만난 날, 그를 따라가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노턴, 건축가 사무소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으로 그날도 새로운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그를 방문한 남자는 제럴드 헌트라는 이름의, 에드워드보다 훨씬 큰 키의 히스패닉 남자였다.

"오, 에드워드. 꽤나 고전적인 이름이군요."

그 남자의 말로 테오는 비로소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날은 그의 일터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알게 됐는데, 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에 그들의 사무소를 발칵 뒤집어놓은 일은 에드워드가 작업한 설계도가 도용당한 사건으로, 사실 그의 상사는 앞으로도 그의 성과를 가로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 직장 동료는 걱정해 주는 척 그의 실적을 시기하고 있었고, 2주 전에 막 들어온 신입은 회사 내의 권력 구도에 대해 무지하며 그저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주는 에드워드에게 의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건물의 높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죠?”

에드워드의 차분한 목소리에 제럴드가 잘 정리된 턱수염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천사가 내려올 만큼 높았으면 좋겠는데요.”

“…천사요?”

에드워드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테오를 쳐다봤을 때, 그는 엉뚱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파의 옆, 텅 빈 허공. 그곳에는 테오가 있었고, 그는 제럴드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착각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금세 제럴드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네, 천사. 어떤가요, 당신은. 천사는 믿어요?”

“저는, 음.”

비즈니스 자리라는 게 늘 그렇듯, 이런 순간에 중요한 건 솔직한 답이 아니라 상대가 바라는 답변이다. 그러나 제럴드는 거기까지 에드워드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는지, 그가 쩔쩔매는 얼굴을 보고는 금세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적어도 60층은 올립시다. 새로 짓는데 울워스에 밀려서야 면이 서질 않잖아요?”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에드워드가 잠깐 말을 잃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목표로 하시는 겁니까?”

그의 말에 제럴드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으나, 테오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물론, 그렇고말고.’

그렇게 테오는 며칠 뒤, 에드워드의 집에 찾아갔다. 첫날 그의 퇴근길을 따라 걸었으므로 그가 어디에 사는지는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나와서 고가 철도로 네 정거장을 간 뒤, 계단을 따라 지대를 내려가면 나오는 골목.

그는 에드워드의 하루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렇게 아침 해의 햇살이 거의 들지 않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에드워드는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곧 시끄럽게 울리는 자명종이 그를 잠에서 깨웠다. 에드워드는 눈을 감은 채로 팔을 뻗어 알람을 끄고 느릿하게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테오는 그가 자신의 팔을 안고 두 손으로 양팔을 쓰는 모습도 전부 보았다. 뉴욕의 1월 기온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다. 그는 에드워드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러자 에드워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테오가 막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에드워드가 그의 너머에 있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테오는 위쪽을 바라보는 에드워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옅은 시선이 몇 초간 같은 자리에 고정된다.

“슬슬 나가야지.”

집을 나서서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에드워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출근을 한 뒤에는 더욱 생각이 단조로워진다. 그는 지금 받은 일을 몇 시까지 마치면 좋은지, 그리고 미세한 단위의 오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 되새긴다.

그의 속마음이 실제 행동과 교차하는 건 회의 때다. 에드워드의 의견은 대부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상사에게 묵살된다. 그중 대다수가 예산 때문이고, 일부는 현실성과 상사의 취향을 고려하여 기각당했다.

‘지금 이대로 그냥 건물을 지어버리면 절대 주변과 어우러지지 않을 거야. 경관은 물론이고 그 땅, 그곳에 사는 사람들…….’

돈 계산에 여념이 없는 상사의 목소리와 다른 사원이 그날의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테오는 에드워드를 따라 회사를 나섰다. 그는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건물이 세워질 지역의 주변에 관해 더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테오는 난간에, 층계에, 책상 위에 앉아 있는 동족들을 본다. 몇몇은 테오를, 또다른 이들은 그의 앞에서 걷고 있는 에드워드를 쳐다본다. 그러나 내려오지 않는다.

그는 최종적으로 두꺼운 책 다섯 권을 짊어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탑처럼 쌓인 책을 한 권씩 넘기면서 쓸만한 것들을 종이에 메모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테오는 그동안 에드워드의 책상 옆에 앉아 글씨를 적는 에드워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새로 세워질 건물을 거대한 벽이나 성역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하고 있었다. 그의 일과는 사무실 전등을 켜고도 두 시간쯤 지나서야 끝났다. 남은 일들이 아직 있지만 에드워드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집 근처에서 사 들고 온 볶음밥을 먹고 남은 건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의 집은 좁다. 책상에서 일어나 냉장고 앞을 경유해서 화장실에 가기까지 대여섯 걸음이면 족하다.

‘내일까지만 나가면 하루는 쉴 수 있어.’

에드워드는 침대에 누우면서 일요일에는 린다를 만나야겠다고 다짐한다. 린다는 정말 특별한 여자야,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사고는 아직 도면도 나오지 않은 건물로 뻗어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

그는 건물의 입구를 상상하고 테오는 그 건물의 옥상에 오르는 날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는, 도서관에서 이본과 대화한다. 없어, 그 말을 듣고 마음을 완전히 굳힌다. 그는 에드워드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결심이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만남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에.


 


 

“저, 여기는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요.”

“항상 다니는 곳이야.”

허술하지만 교묘한 대답이다. 다행히도 그 대답은 에드워드에게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관계자인가. 하긴, 외부인을 그렇게 쉽게 안에 들일 리가 없지.’

“실례했습니다.”

에드워드는 곧 철거 예정이라 비워진 건물 부지에 사람이 들어올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테오는 그의 오해를 일부러 정정하지 않고 같이 걸을 것을 제안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쳐다봤지만, 거절하지 않고 동행을 수락했다.

“동네 주민이신가 봐요.”

“말 편하게 해도 돼.”

“으음. 알았어요. 에드워드 노턴이야.”

“테오.”

에드워드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을 보러 왔었지.”

“여기서는 질리도록 볼 수 있었겠네.”

건물 안에는 텅 빈 진열대와 작동을 멈춘 냉장고, 사람이 서 있지 않은 계산대가 즐비했다. 건물 초입의 반쯤 떨어진 간판들에서 작은 카페와 옷 가게, 약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의 오래된 마트는 한 달 반 전에 폐점했다. 에드워드의 상사는 건물 주인이 이 좋은 땅을 고작 2층짜리 마트 건물로 썩히기에는 아까워한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고스란히 테오에게도 들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상사는 말로도 했다. 제럴드를 향한 험담도 함께였는데, 거기에 동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쪽 가게는 항상 만석이었지.”

테오는 계산대 바깥쪽에 불 꺼진 네온사인 간판을 가리켰다. 건물 내부에 임시 벽을 세워서 바 자리를 만든 곳에 아이스크림 가게의 상징과도 같은 샛노란 플라스틱 의자들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식 듣고 많이 아쉬웠겠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에드워드는 이 건물에 한 번도 와본 적 없다고 말했다.

“문 닫기 전에 와봤으면 좋았을걸. 아, 나는 건축가야.”

건물을 없앤 원수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줘, 에드워드는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테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는, 여기에 어떤 건물을 세울 거냐고 물었다. 그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작게 웃었다. 그는 소중한 보물을 소개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주 높은 건물.”

“세상에서 가장 높은?”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주변 사람들이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 건물을 짓고 싶어.”

“어려운 길을 가네.”

“너는 그래보고 싶었던 적 없어?”

“그럴걸.”

“평이한 대답이네.”

그는 아,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쪽에는 징크스가 있거든. 나쁜 얘긴 아닌데.”

에드워드는 출구라고 적힌 여닫이문을 지나 계산대 저편으로 넘어가면서 말했다.

“철거할 건물에서 만난 사람은 귀인이라서, 나중에 그 자리에 건물을 올릴 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잘 대해준다?”

테오의 말에 에드워드가 쿡쿡 웃었다.

“대접해서 나쁠 거 없다는 거지.”

사무실 건물에서는 일 얘기 외에 조용하던 남자는 곧잘 테오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자신의 집 근처 작은 마켓에서 일하는 할머니에 관해 이야기했다. 집 주변에서 뭘 사려면 그 슈퍼밖에 선택지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테오는 그의 집 맞은편 왼쪽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온종일 앉아 있던 할머니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뜨개질을 하다가 며칠 전에 에드워드에게 맥주를 팔았다.

테오는 황량하게 빈 판매대 옆을 지나면서, 몇 달 전에 왔을 때는 이 근처에서 크리스마스 용품을 팔고 있었다고 말했다. 마트는 크리스마스가 오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금세 주제는 성탄절로 옮겨갔다. 에드워드는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도 그래.”

“무슨 일 하는데?”

“사람 만나는 일.”

에드워드는 그의 말이 더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잠자코 기다렸지만, 테오가 더 말이 없자 단념하고 그에게 식사를 권했다. 그날 저녁, 테오는 피시앤칩스를 먹으면서 조금 취한 에드워드에게 건축가가 된 이유를 들었다.

“마을에 있던 건물이 무너졌거든. 자주 가던 곳도 아니고, 지나가다 가끔 보던 곳이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어. 이상하지?”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하하.”

에드워드는 졸려 보였다. 테오는 그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따로 갈 곳이 있다고 했다.

“클럽에 잠깐 들를 거야.”

테오는 주저 없이 말했다.

“나도 갈래.”

“네가?”

“어. 당신 취했어.”

“나 취했어…?”

테오는 이 이상 에드워드의 반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허리를 잡고 클럽으로 향했다. 에드워드는 이렇게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 걸을 수 있다고 했지만, 그가 말없이 고쳐 잡자 더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모히토 클럽은 에드워드의 사무실보다도 좁았다. 무대 위에서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댄서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홀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는데,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의자가 없는 높고 동그란 테이블 근처에 서자 근처에 있던 남자와 여자 한 명이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다.

“어머, 네드. 이게 얼마 만이에요. 옆은 친구?”

“한동안 소식이 없다 했더니, 이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거로군!”

에드워드는 남자의 말에 급히 해명하려는 듯이 양손을 내저었다. 그는 테오가 부당한 오해를 받지 않을까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정작 그의 속마음을 전부 듣고 있는 테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친구는 맞지만. 오늘은 린다를 만나러 왔어요.”

“린다? 이번 곡이 끝나면 내려올 거야.”

남자는 무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에드워드를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그나저나 자네, 이번에 새로 나온 스콧의 신작은 읽어봤나?”

“제목이 어떻게 되죠?”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

“이런. 아직이요.”

“딱 절반 읽었는데 굉장히 마음에 들어.”

그들은 뉴욕에서 유행하는 소설과 그림,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에드워드는 그들이 말을 하게 내버려두고 테이블에 기대어 그들의 말소리를 듣고만 있었는데,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예술 사조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그는 곁눈질로 테오를 쳐다보았다. 그는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두 사람을 놔두고 테오에게 작게 속삭였다.

“술은 거의 다 깼으니까, 먼저 돌아가도 괜찮아.”

“됐어.”

테오는 손을 휘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는 그의 거절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그냥 웃어 보였다.

곧 무대에서 주황 머리의 여자가 내려왔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머리를 비대칭으로 올려 고정한 여자는 테오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처음 보는 손님이네.”

이 사람도 내 춤에 넘어올까? 그녀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테오에게 들려왔다.

“당신이 린다?”

“네드가 벌써 소개해 줬나 봐. 맞아. 당신은?”

“테오.”

“작가? 화가? 가수? 배우? 아니면…”

“이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야. 린다, 오늘은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왔어.”

에드워드의 난입에 린다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갔다.

“이번에도 건물이겠지?”

“맞아.”

“아쉽네.”

에드워드는 그 뒤에 짧게 린다와 건물 부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나라의 고전 건축 양식을 모티브로 주변의 공원과 건물에 어우러지려면 어떤 방향성이 나을까 하는 이야기였다.

이때쯤 클럽의 어두운 조명에 묻힌 게 아니라, 정말로 에드워드의 뺨에서 술기운이 완전히 빠졌다. 그와 린다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언제든 돌아와도 돼.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린다의 작별 인사에 에드워드는 웃고는 돌아섰다. 테오는 아까 그의 허리를 잡고 걸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함께 밤길을 걸었다. 클럽에 있는 동안 진눈깨비라도 내렸는지, 젖어있는 길바닥이 가로등 불빛에 번들거렸다. 에드워드는 찰박거리는 바닥을 응시하면서 걷다가 말했다.

“지루했지?”

“뭐… 저 사람들은 뭐야.”

“예전 친구들.”

에드워드는 가로수에서 안경알로 떨어진 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거든.”

테오는 뒤를 한 번 돌아봤다가, 다시 에드워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들은 그때의 당신을 기억해서 돌아오라고 하는 거고?”

“맞아.”

“왜 떠났어?”

‘왜 떠났더라.’

에드워드는 밤을 걷어내려고 강렬하게 번쩍거리는 간판 불빛들을 보다가 대답했다.

“그림을 그리는 걸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어.”

“그래서 선택한 거야.”


 


 

“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니?”

테오도 선택했다. 이 질문은 그의 선택으로 돌아온 문답이다.

“그냥.”

이본은 그의 짧은 대답으로는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테오는 정말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신경 쓰여서… 그러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 우리의 모든 권능은 쓰임새가 있어서 내려진 거야.”

“그럼,”

테오는 이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그러지 않지.”

이본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내게는 필요 없으니까.”

테오는 가까워지는 지면을 보면서 이본의 차가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옥상에 오기 전에 이본에게 떨어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래.” 그 대답이 끝이었다. 예상 못 한 바는 아니었다. 그는 이본이 말리지 않을 걸 알았고, 그러길 바라지도 않았다. 자신이 해온 일은 다른 천사가 그의 자리를 채워서 이어 나갈 것이다. 그는 천사가 가진 모든 것들을 뒤로한다. 아쉬운가? 아쉽지 않은가?

“아쉬울 게 없으면 도박이 성립하질 않아.”

제럴드는 수십 장의 종이를 플레잉 카드 펼치듯 늘어놨다 다시 겹쳤다.

“잃을 게 있어야 간절해지는 법이지. 뭐, 나는 이쪽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자를 기다리고 있거든. 어떠냐, 테오.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가 테오를 쳐다보자, 테오는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남자의 시선은 금세 그로부터 떨어져, 앞쪽에 쪼그려 앉은 작은 남자아이에게로 향했다. 곧 아이의 엄마가 달려왔다.

“아니, 얘가 말도 없이 어디를.”

여성이 안아 든 아이의 목에서 이니셜이 각인된 은제 하트 목걸이가 흔들렸다. 선명한 J다.

에드워드를 진료한 의사의 머리글자도 같은 J였다. 의사의 책상 위 문패에 제롬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렇다. 에드워드의 건강은 나빠지고 있었다.

테오가 자연스럽게 귀인 이야기를 꺼내면서 연락을 해온 뒤로, 에드워드가 외근을 할 때 두 사람은 행동을 같이하게 됐다. 처음에는 에드워드도 정중하게 거절했고 그런 한편으로는 그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의 눈에 테오는 앞으로 지어질 건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결정적으로 한가해 보였다. 기실 테오가 실제로 관심이 있는 건 에드워드였고 이 또한 천사의 일과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의 오해는 동행에 도움이 됐다.

에드워드의 주된 일은 측량이었다. 텅 빈 마트 건물이 남아있던 때, 그리고 건물이 마침내 무너져 메마른 땅만이 잔존하게 되었을 때도 에드워드는 수없이 땅의 경계를 찾았다. 처음 며칠은 함께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도 나누었고, 하루는 테오가 사무실 건물 앞에서 그의 퇴근을 기다려 같이 식사를 하고 그의 집까지 들렀다 돌아가는 평범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점점 일정은 당겨졌고 무리해야만 겨우 맞출 수 있을 만큼 업무가 늘어났다. 다른 경쟁 회사에서도 비슷한 의뢰를 받아 건물을 올린다는 소식에 상사의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뉴욕에 비가 쏟아졌다. 어중간한 추위에 눈이 녹아 비가 되어 내렸다.

아주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만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옥상에서 두 사람은 눈을 보았다. 에드워드의 시선은 눈에 머물렀고, 테오는 곧 그의 눈을 응시했다.

“오늘은 쉬어. 몸 상해.”

“나 참. 내 일정 알잖아.”

에드워드는 그의 충고를 농담처럼 받아들였고 옥신각신하던 끝에 테오는 그를 잡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나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 들리는 소리, 그런 것들뿐. 커진 에드워드의 두 눈과 말을 잃었다가 겨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그런 것이 전부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자신에게는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인간과 천사의 우열을 가른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지만, 테오로 하여금 가지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일 이후로 에드워드와의 관계가 나빠졌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테오는 태연하게 에드워드의 일터에 나타났다. 어제 나한테 키스했으면서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에드워드는 조금 퉁명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밭은기침이 이어졌다. 그날, 테오는 그가 볼 수 없는 모습으로 그의 방을 찾았다. 에드워드는 좁은 침대에 옆으로 누워 무언가에 시달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를 억누르는 것이 악몽이라면 깨우면 되고, 오한이라면 병원에 보내면 됐겠지만 그를 괴롭히는 건 이 시대였다. 그것은 빛이 잘 들지 않는 이 집에서 아침을 맞이해도 결코 도망칠 수 없는 흐린 하늘이다. 설계도는 에드워드 노턴이라는 한 인간을 갈아 차근차근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어두워지는 낯빛과 대조적으로 종이는 차차 빼곡해졌다.

테오는 에드워드가 잠들기 전에 그가 앉은 자리 옆에 앉아 그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가 뭐가 떠오른 건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쥐어 든 건 볼펜이었다. 테오와 함께 거리를 걷던 때, 마침 심이 나간 볼펜을 새로 사기 위해 함께 골랐던 물건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펜을 들고 있지만, 테오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테오에게 들린다. 다시 펜은 책상 위에 남겨졌고 에드워드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테오는 옥상에 올랐다. 그에게도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 일들은 천사의 손으로 행하기에는 21그램만큼 부족하게 느껴졌다.


 


 

“…….”

테오는 눈을 떴다. 그의 몸은 바닥에 내던져지듯 널브러져 있었다. 건물의 서쪽에 떨어졌다면 지금쯤 사람들이 모여 한 차례 큰 소동이 벌어졌겠지만, 건물 뒤편의 동쪽은 적막하기만 했다. 길을 지나던 한 노인이 그를 발견하고 혀를 찼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길바닥에 덜렁 누워있는 남자가 이 건물의 옥상에서 떨어졌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테오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젊은이에게 훈수를 두듯 힘이 실려 있었다.

“누워있으려면 저 건너편 바닥이 더 나을 거다. 거긴 재수 없으면 위에서 구정물이 떨어지거든!”

노인의 말에 테오가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건물의 외벽과 외벽 사이를 잇는 녹슨 파이프의 접합부에 물방울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테오는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통증을 느끼고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천천히 떼어낸 손에 끈적한 액체가 묻어났다.

“저런.”

지금까지 노인의 인생에 길을 가다가 길바닥에 다쳐 드러누운 사람과 마주치는 건 종종 있던 일이다. 자연스레 반응도 단조로워졌다. 노인의 상투적인 탄식에 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방금 닦아낸 핏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빨갛네.”

“빨갛지.”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노인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테오는 그 뒤로도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숙여 자신의 옆에 떨어져 있던 묵직한 물건을 주워들었다. 앞으로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뉴욕의 눅눅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걸었다. 걸을 때마다 머리와 팔과 등과 다리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욱신욱신 쑤셨지만 그런 감각조차 달갑고 생소하게 느껴졌다. 테오는 우선 보이는 가게로 들어가서 청동 갑옷부터 팔아치웠다. 전당포 주인은 그의 행색을 보고는 가격을 후려치려고 했지만, 그는 주인을 윽박질러 제값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얻은 돈으로 테오는 철도표를 끊어서 열차에 올랐다. 전과 다르게 열차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테오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정적이다. 그는 올바른 정류장에 내려서 도보를 걸었다. 에드워드가 일하는 사무실 건물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

현존하는 인류 안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테오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반가워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에드워드 노턴이 서 있었다.

“요 며칠 못 봤네. 그날 병원 들른 뒤로도 한동안 몸이 별로 안 좋았거든. 그래서….”

“알아.”

“안다니, 어떻게? 설마 나 회사 쉬는 동안에도 나와서 기다린 건 아니지?”

그의 대답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개를 저은 테오는 그에게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에드워드가 더 빨랐다.

“잠깐. 다쳤잖아….”

에드워드가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건 당신이었네. 마침 점심 시간이니까, 나도 그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어. 병원 가자.”

테오는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에드워드의 서늘한 체온을 느끼면서도 그를 따라 걸음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팔이 당겨지는 감각에 에드워드가 그를 돌아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테오가 말했다.

“잠깐.”

“잠깐은 무슨 잠깐이야. 지금도 머리에서 계속 피 나는데.”

“에드워드, 잠깐만.”

그는 이 시점에 테오가 자신의 행동을 제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 갈 곳이 없어.”

“…응?”

“당신을 만나러 오느라 다 썼거든.”

“돈을?”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에드워드의 손에 힘이 조금 풀렸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그의 선언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손을 테오가 힘주어 다시 잡았다.

“뭐, 이것저것.”

“너무 대책 없는 거 아니야?”

에드워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듯 웃었다.

“왜 그런 거야?”

“말했잖아.”

테오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만나러 왔다고.”

“…….”

에드워드는 그에게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그의 말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가 받은 여러 물건이나 보상보다도 달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새 에드워드는 자신도 모르게 허락의 답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고도 도로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 한동안은….”

“한동안만?”

테오의 질문이 한층 더 집요해지자 에드워드의 대답에도 가벼운 장난기가 깃들었다.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의 표정은 갑자기 늘어난 객식구를 쫓아내려는 집주인의 표독스러운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테오가 실체를 가지고 그에게 말을 건넨 순간부터 부쩍 자주 봤던 바로 그 표정이다. 그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다가 그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에드워드는 놀라면서도 그의 접근을 거부하지 않았다. 테오는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느끼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이제 에드워드의 귀밑이 어떤 색으로 물드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붉은색이다.


 


 

뉴욕 포스트 일간지의 좁은 면적이 저명한 날씨 전문가에게 배당되었다. 그는 곧 추위가 가시고 날이 풀릴 거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견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도시에 한파가 찾아왔다. 눈은 낮은 곳에도 내렸다. 에드워드의 집에서도 창밖에 쏟아지는 눈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오늘은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겠네.”

“뭐 필요한 거 있어? 지금 나가서 사 올까.”

“없어.”

에드워드는 만류하듯 테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새로 생긴 습관이다. 그는 테오가 궂은일을 도맡아 하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그를 말렸다. 통할 때도 있었고, 씨알도 안 먹힐 때도 있었다.

테오는 주물 난로에 불을 때고는 에드워드의 옆에 돌아와 앉았다. 그러는 사이 눈에 띈 물건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스케치북이었다. 에드워드와 같이 살면서 테오에게도 그가 설계 도면을 스케치하는 걸 옆에서 볼 기회가 자주 생겼다. 그래서 책상 위에 놓인 이 새로운 물건이 평소에 그가 작업할 때 쓰는 것과는 다른 애매한 크기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새 걸 샀네.”

“노트?”

“응.”

“예전에 쓰던 거야. 음, 거의 안 쓰고 내버려뒀던 거라. 새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그렇게 대답하면서 에드워드는 책상 위의 스케치북을 가지고 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드워드의 혈색은 예전에 비해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테오의 도움을 받아 에드워드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는 요 며칠 일에 매진했고, 지난하던 설계 도면 작업에도 차츰 끝이 보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그의 손보다 약간 큰 무지 노트의 표지에는 런던의 시계탑이 그려져 있었다. 에드워드는 테오의 시선이 노트에 가 있는 걸 확인하고는 표지를 넘겼다.

노트의 첫 장에는 스펜서 빌딩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동쪽으로 가면 있는 높은 건물이야. 가끔 가서 뉴욕 전경을 내려다보곤 했었거든.”

다음 장으로 넘기자, 스펜서 빌딩의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뉴욕의 모습이 간략하게 스케치 되어 있었다. 펜으로 휘갈겨 그린 낙서지만, 테오는 노트에 그려진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테오는 그의 노트를 잡고는 뒤로 넘겨보았다. 거기서부터는 빈 종이였다.

“그게 끝인데.”

에드워드가 머쓱해하면서 말했다. 그는 노트를 도로 가져와 나머지 페이지를 엄지손가락으로 훑어 넘기면서 말했다.

“그래도 가끔은 그려보려고. 앞으로 지어질 건물이나, 같이… 가는 장소들이나.”

그는 테오가 자신을 바라보기도 전에 잽싸게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테오는 에드워드의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는 어렴풋이 뉴욕에 앞으로 어떤 역풍이 불어닥칠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떨어진 천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암운처럼 드리워 있었다.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뜻하네.”

그러나 그는 겨울을 이겨낼 방법을 알고 있다. 테오는 에드워드의 추위를 잊게 해줄 사람이다. 이제 그의 손은 에드워드의 체온을 느끼고, 그에게 온기를 나눠줄 수 있다. 뉴욕의 기나긴 겨울에도 언젠가는 끝이 온다.

“에드워드.”

“응.”

“방금 그림의 그 옥상에서, 당신을 만난 적이 있어.”

“음? 거기서?”

그날을 함께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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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정보

출연

테오

Theo

​제작

에드워드 노턴

Edward Naugh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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