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합작에는 CoC 시나리오 <스승의 은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봄은 끝난 지 오래고 여름은 눈 깜짝할 새에 가버렸다. 어느새 바람이 차가워지고 가지가 마르는 계절이 왔다. 누군가는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라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 가을은 풍요와 수확의 계절이다. 그를 증명하듯이 발 밑에는 낙엽이, 눈 위에는 앙증맞은 축제 장식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과, 도토리, 옥수수, 호박.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수확물 그림 아래로는 크림을 얹은 펌킨파이와 사과잼이 든 쿠키, 유리병에 차곡차곡 담은 밤조림이 보였다. 과연 수확제다운 광경이었다.
“먹고 싶어?”
시어도어가 가볍게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조그만 유리병을 톡 건드렸다. 아이작의 시선이 장식으로부터 가판대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아,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작은 바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가, 푸른 홍채와 마주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와 눈높이가 맞을 정도로 자랐지만 여전히 아이작은 시어도어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정답만 말하고 싶고 부족한 부분을 들키고 싶지 않다. 동시에 어떤 말을 해도 스스로의 결함이 탄로나는 기분이라 한 것도 없이 부끄러워졌다.
“선생님은…… 좋아하시나요.”
“싫어하진 않아. 챠에 곁들이면 어울리지.”
“차를 좋아하셨죠.”
시어도어는 잠깐 생각하다가 긍정했다.
“……그래. 좋아하는 편이야.”
아이작은 그 짧은 침묵에 안절부절못했다가, 이어지는 대답에 겨우 한시름 놓았다. 시어도어가 제자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들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아이작이 전전긍긍하고 시어도어가 허락한다. 썩 만족스러운 대화법은 아니었지만 이게 그들의 최선이었다. 아이작은 선생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학생이었다. 시어도어는 몇 번이나 아이작에게 편하게 대하기를 권했지만 그는 에둘러서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결정했음에도, 이런 아이작의 죄책감과 후회를 못본 척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시어도어도 타협을 한 셈이다.
“모처럼이니까 조금 살까.”
“선생님이 드시고 싶으시다면 뭐든요.”
“종류가 많네. 넌 어떤 게 좋아?”
“…….”
아이작이 은근슬쩍 시어도어의 눈치를 살폈다. 의도는 뻔했다. 시어도어가 좋아하는 다과를 고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시어도어는 이런 쪽으론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아이작에게 머물러 있었다. 정답을 읽어내기는커녕 조금의 힌트도 얻지 못한 아이작은 어려운 숙제를 받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다가 결국은 지고 말았다.
“……밤조림으로요.”
“그래. 밤을 좋아했던가.”
“집에 있는 얼그레이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제자가 자신감 없는 투로 꼬질꼬질 내놓은 답안을 듣고 시어도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아이작이 시선만 슬그머니 올려 분위기를 살폈다.
“그렇겠네. 집에 돌아가면 차를 우려줄래?”
부드러운 말이 흘러나오자 아이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물론 네 몸이 괜찮다면.”
“괜찮아요. 선생님이 살펴 주신 덕분에…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요.”
말을 무를까봐 걱정이라도 됐는지 아이작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시어도어에게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에요. 선생님이 저택의 커튼을 바꿔 주신 덕분에 바람도 들지 않고…”
“그래 알았어. 의심한 게 아니야.”
“…….”
“잘 됐다고 생각한 거지.”
멍하니 미소 짓는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작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시어도어는 이 행동이 제자가 민망할 때 보이는 습관이라는 걸 알았다. 이럴 때면 시어도어도 예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깡마른 아이를 소개받고 그 아이로부터 서재와 방을 안내받았을 때 말이다. 종종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서서히 고이는 것만 같다. 그때의 아이작은 지금보다 한참 작았는데도.
그들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던 늦봄. 아이작은 자신이 더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는 죄를 너무 많이 지은데다가, 시어도어의 대답을 듣고 ‘이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해 버리기까지 했으니까. 기절하듯 정신을 잃고 눈을 떴을 때, 여전히 곁에 선생님이 있는 걸 본 아이작은 뛰던 심장이 다시 멈출 뻔했다. 역으로 지나치게 빨리 뛰던 맥박은 시어도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보고 나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간신히 삶을 허락받은 뒤에도 아이작의 건강이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남은 죄업을 마저 치르듯 아이작은 여름을 거의 죽어 지냈다. 다행히 위독했던 상태도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치자 조금씩 나아졌다. 점점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제법 오래 걸어도 쓰러지지 않게 됐다. 꾸준히 회복세가 이어진 덕분에 시어도어도 아이작의 이번 동행을 허락해주었다. 이왕 첫 외출이라면 수확제 시기가 좋을 테니까.
시어도어 노스코트에게는 여전히 선생님다운 부분이 있었다. 1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는 아이에게 즐거운 것과 따스한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어른이다.
“슬슬 돌아가자. 꽤 오래 있었어.”
짧게 상념에 잠겼던 시어도어가 곧 병에 든 밤조림을 계산했다.
“전 괜찮아요… 더 돌아보고 싶으시면.”
“구경은 다 했어. 지금 돌아가야 저녁 시간에 맞출 수 있겠지.”
“……그렇게 할게요.”
완곡한 표현에 아이작은 금방 수긍했다. 아이작은 툭하면 시어도어를 위해 무리하려 들었다. 정말로 괜찮은 줄 알고 승낙했다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모습을 발견한 이후로 시어도어는 조금 더 엄해졌다. 하지만 그가 엄격하든 느슨하든 간에 아이작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순종은 대가라기보다는 기쁨에 가까웠다. 아이작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옆방에 있을 시어도어를 떠올렸다. 선생님이 여기 있다. 내가 일어날 수만 있다면, 걸어서 방 앞까지 가 그 문을 열 수만 있다면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 그 간결한 사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앞지르고 삶의 동기가 되어주었다.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으니. 그 누가 행복하지 않을까?
“마차를 타고 가자. 이 시간이면 돌아가는 길이 좀 붐빌 거야.”
“네.”
어느덧 석양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시어도어의 말대로 저마다 손을 맞잡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때마침 마차 한 대가 두 사람 앞에 섰다. 시어도어는 아이작이 먼저 타도록 했다. 뒤이어 오른 시어도어가 문을 닫으며 “로도스 저택으로요.” 하고 말했다. 마부는 별 대답 없이 저택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선생님.”
문득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응?”
시어도어가 자연스럽게 제자와 마주보았다.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할 것까지야. 원래 나오려고 했어. 살 물건도 있었고.”
“물론 제가 없어도 나오셨겠지만, 선생님과 수확제 거리를 걸을 수 있어서… 기뻤어요.”
너무 솔직해서 일견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은 상대에게 전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어도어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때.
말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이유를 깨닫기도 전에 마차가 크게 흔들리더니 굉음을 내며 어딘가에 부딪혔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완전히 부서졌다. 시야가 기울며 승객 두 사람은 바닥에 거의 내동댕이쳐졌다. 거센 충격에 절로 기침이 나왔다. 아이작은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신음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나의 아픔 따위가 아니었다.
“선, 생님…….”
선생님은?
선생님은 어떻게 됐지? 무사하신가?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선생님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는 외침이 종소리처럼 울려퍼졌다. 아이작은 흐릿한 시야를 억지로 움직여 시어도어를 찾았다. 선생님만 문제 없다면. 다리가 망가지든 폐가 찢어지든 아무 상관 없었다.
그러나 지나친 행복에 잠시 잊고 말았다.
아이작 로도스의 간절한 바람은 늘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아이작…….”
힘겨운 목소리가 아이작을 불렀다.
“선생님.”
아이작은 미친 사람처럼 기어 그 방향으로 향했다. 팔과 다리가 피로 물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도착한 곳에는 마차 파편에 옆구리를 꿰뚫린 시어도어가 쓰러져 있었다. 그 몸에서 흐른 피는 이미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 아이작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선생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작은 ‘선생님’이라는 말 외에는 잊어버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선생님. 선생님. 죽지 마세요. 죽으면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제발… 다 까진 손을 어떻게든 뻗어 시어도어를 감싸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걸론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아이작의 품에 기댄 시어도어는 침묵한 채였다.
선생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선생님.
마찬가지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이작은 미친듯이 떨리는 손길로 선생님을 붙잡고, 그의 차가운 체온과 멈춰버린 맥박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럴 리 없잖아. 갑자기 선생님이 나를 이렇게 떠나버릴 리 없어. 죽어버릴 리가 없다. 이건 분명히 무언가 잘못됐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속에서 시어도어 노스코트의 죽음만이 점점 선명해져 갔다. 마침내 숨을 잃은 시어도어의 신체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지려던 순간.
“……아이작.”
희미해진 의식 너머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아이작이 거친 숨을 뱉으며 깨어났다. 햇살이 몸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아이작은 용수철처럼 침대 위에서 튀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연약한 몸은 말을 듣지 않아 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는 데 그쳤다. 그 여파로 폐부에서 기침이 터져나왔다.
“잠깐. 왜 그래? 진정해, 아이작.”
“콜록, 콜록…….”
아이작이 몸을 굽히고 연신 마른 기침을 내뱉자 시어도어가 그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여름을 지내며 그는 제자를 돌보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따스한 체온이 닿자 아이작의 기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침대 시트에 핏방울이 튀지 않은 걸 확인한 시어도어는 가볍게 안도하며 손수건을 건넸다.
“찬바람은 안 드는 것 같았는데. 혹시 추웠어?”
“아뇨…….”
간신히 숨을 고른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시어도어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
아이작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걱정스러운 선생님의 얼굴 위로 피비린내와 소음이 겹쳐졌다. 인지 체계가 망가진 것 같았다. 머리는 몸이 구르고 마차가 부서지고 시어도어가 피를 흘리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데 눈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있다. 정반대의 상이 뇌를 가로지르고 감각을 갈기갈기 찢으려 했다.
“아이작. 아이작, ……내 말 들려?”
“서, 선생님.”
낮은 목소리가 한 번 더 아이작을 끌어올렸다. 그제서야 아이작은 겨우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불안한 시선이 시어도어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정갈한 눈썹, 곧은 콧대와 다물린 입술을.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얼굴에는 작은 상처 하나 없었다. 그는 무사하다. 그러나 아이작의 손과 발에는 여전히 그떄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아이작의 시선이 자신의 손 위로 향했다.
아이작 로도스는 10년간 매일 악몽에 시달려 왔다. 끔찍한 악몽 이후의 아침은 수도 없이 겪었다. 꿈이 너무 생생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두려움이 차오를 리 없다. 아이작이 조용하자 시어도어는 잠깐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천천히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약을 좀 더 짓는 게 좋을까.”
선생님이 눈썹을 미미하게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수확제 기간이지만 연 곳은 있겠지. 금방 다녀올게.”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의자에 걸쳐둔 겉옷을 집어들었다.
“안 돼요!”
“응?”
아이작이 황급히 시어도어의 팔을 붙잡았다.
“금방 돌아올 거야. 가서 약만 새로 지어올 테니까.”
“아… 아니에요. 제 몸은 괜찮아요. 약은 필요 없어요.”
“…….”
횡설수설하는 투에 시어도어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오늘 쉬라고 하지 않을게. 약속은 지킬 거야. 약을 먹은 다음에, 해가 떨어지면 거리로 나가자.”
“그것도 안 돼요!”
시어도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는 제자가 외출을 취소하기 싫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그럴듯한 추측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말을 이었다.
“……새, 생각해보니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정말 가고 싶었는데, 오늘 외출은 다음으로…….”
“그러면 더더욱 약을 지어와야지.”
“그, 그건 안 되는데.”
“…….”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요구는 많은 주제에 이유는 맞물리지 않고 두서가 없었다. 시어도어는 이게 단순한 심술인지 아니면 병증의 일환인지 가늠해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수록 아이작은 점점 더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곤혹스러워졌다. 결국 아이작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집에서 같이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하루종일?”
아이작이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사러 가는 것도 거리로 나가는 것도 싫고 그냥…….”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이 주저하다가 시어도어의 손등을 건드렸다.
“……여기서 같이 있고 싶어요.”
그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지만 오히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도 부끄러웠다. 스스로의 바람을 터놓고 말하는 건 언제나 그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이 없어 아이작은 추궁당하는 죄인처럼 가장 깊은 욕망을 털어놓아야 했다. 아이작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목 뒤와 귓가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음.”
그 모습을 보던 시어도어가 짧게 소리를 냈다. 그가 어떤 표정일지 두려워 시선을 드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하지만 동시에 선생님의 모습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눈에 담고 싶기도 했다. 결국은 후자의 욕구가 이겼다. 아이작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어리광이 늘었어.”
노스코트 선생님은 웃고 있었다. 그 모든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 전처럼.
“알겠으니까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네 말대로 하자.”
시어도어가 손을 움직여 아이작의 마른 손등을 덮었다. 그러자 마법처럼 모든 게 괜찮아졌다.
아이작은 마차 사고가 있던 날 아침으로 돌아왔다. 눈꺼풀이 무거워 깨어나는 시간이 늦자 시어도어가 그를 깨우러 온 것까지 똑같았다. 영문 모를 일에 아이작은 저택 깊숙한 곳에 묻어둔 불온한 서적들을 떠올렸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녀장이 흔적 하나 없이 사라져 버린 후로 두 사람은 나름대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아이작은 불 앞에 오래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워했지만 호시탐탐 요리를 할 기회를 노렸다. 물리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본다면 아이작의 솜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주방장이 식사를 한 번 차릴 때마다 쓰러진다면 아무래도 순순히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오늘 새로 재료를 사올 생각이었어서 남은 게 별로 없네. 어제랑 똑같은 것도 괜찮아?”
“괜찮아요. 아니, 좋아요.”
아이작이 다급하게 대꾸하며 식탁에 앉았다. 사실 2층에서 내려오는 동안 몇 번이나 휘청이며 넘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나 보니 아이작은 스스로가 전혀 진정하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짝조차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선생님을 더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시어도어가 주방으로 간 틈을 타 아이작은 꼴사납게 벽과 손잡이를 붙잡고 내려왔다. 우스운 꼴이라도 그럴듯하게 보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다행이지만.”
시어도어가 비프 스튜를 그릇에 덜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간소한 샐러드와 빵이 곁들여졌다. 이제 상다리가 부러질 듯 화려한 식사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작은 한 번도 아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저 꿈 같은 날들이었다.
“…….”
그렇기 때문일까?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건.
이런 행복이란 애초에 허락되지 않은, 찰나의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
“식기 전에 먹어.”
“……아, 네.”
“마음에 안 들어? 왜 그런 표정이야.”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이작은 손을 내젓고는 스튜를 떠서 입에 밀어넣었다. 따뜻한 음식은 삶을 실감하게 한다. 어제와 같은 맛은 오늘의 연속성을 알려준다. 삶은 고기와 감자가 입 안에서 뭉그러지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잠깐. 아이작, 우는 거야? 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제서야 아이작은 진짜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덩달아 당황한 아이작은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만.”
노스코트 선생님이 제자의 손목을 가볍게 틀어쥐었다.
“아…….”
“상처 나겠어. 괜찮아. 탓하려던 게 아니니까.”
“…….”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서, 선생님. 저…….”
“아이작. 나한테는 말해도 돼.”
시어도어는 자연스럽게 제자를 어린 시절처럼 대했다. 아이작은 그 태도가 가슴이 조여들 만큼 좋으면서도 깜짝 놀랄 만큼 슬퍼졌다. 동시에 스스로가 성가셔서 좀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을 써주면 당연하게 기쁜 주제에. 상대에게 애꿏은 일을 시켰다는 생각에 침울해지다니.
“……식, 식사를 다 하고 나면.”
“응.”
“올라가서… 책을 읽어 주세요.”
“그럴게.”
“무엇이든 좋아요.”
“그래, 같이 고르자.”
아이작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푼을 다시 쥐었다. 시어도어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관계는, 십 년 전 헤어질 때에 비한다면 더없이 평화로웠지만 실상 살얼음 위를 걷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구덩이가 있었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죄의 얼룩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아무리 아이작이 그를 신처럼 따른다 한들. 시어도어 노스코트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눈처럼 새하얗게 씻어내줄 수 없다.
식사를 마친 아이작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흰 침대에 몸을 눕히자 선생님이 그 옆에 앉았다. “무슨 책이 좋겠어?” 시어도어가 가볍게 말하며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뭐든 좋아요. 선생님이 읽어주시는 거라면…….” 답을 예상한 듯 시어도어는 뽑아든 책을 펼쳤다.
“동화로 하자.”
빛바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팔랑이며 넘어갔다. 시어도어의 나직한 목소리가 익숙한 내용을 읊었다. 진실된 사랑의 키스로 눈을 뜨는 공주의 이야기. 그 끝에는 눈물도 슬픔도 없는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습관 탓인지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마치 기다리던 죽음의 순간처럼. 옛날이나 지금이나.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도 괜찮아. 이렇게 생을 마감할 수만 있다면…….
…….
눈을 뜬 순간 아이작은 등줄기를 훑는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소스라치며 일어나니 옆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당장이라도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이작은 몸을 벌벌 떨며 침대를 짚고 벽을 짚어 일어나려 했다. 자꾸만 주저앉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 마구잡이로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동작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협탁을 짚었던 손이 미끄러지며 아이작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이작!”
“서, 선생님.”
시어도어는 협탁과 아이작이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몸을 낮췄다. 그는 아이작을 먼저 일으켜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정신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작은 여전히 몸을 떨며 시어도어의 겉옷을 붙잡았다.
“서… 선생님. 나가지 마세요.”
“……네가 잠든 것 같아서. 약을 가져오려고 했을 뿐이야.”
“가지 마세요. 저를 떠나지 마세요.”
“진정해, 아이작. 떠나려던 게 아니야…….”
“나… 나가시면 안 돼요.”
“…….”
“죽을 거예요.”
아이작은 이제 말을 고르지도 못하고 쏟아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 말 그대로예요. 마차가… 마차 사고가 있었어요. 마차 사고가 일어날 거예요. 선생님이 크게 다치고… 도, 돌아가시니까. 그러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내가 오늘 나가면 죽는다는 거야?”
“네, 마, 맞아요. 그러니까 죽지 마세요. 나가지 마세요. 내일도 어떨지 몰라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위험해요. 마차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으니까. 밖에선 누구라도 선생님을 해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안 돼요. 여기 계속 있어요.”
“…….”
“이 저택에 저와 단 둘이 있으면, 아무도, 아무도 선생님을 해치지 못할 테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예요. 함께 있어요…….”
아이작의 말은 고백으로 시작해서 애원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선생님의 양 팔을 잡은 채로 고개를 어깨에 파묻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분명 시어도어는 피투성이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 일을 반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평생 여기서 함께 하자.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하자. 그렇게 하면…….
“아이작.”
“…….”
“아이작. …고개 들어봐.”
그 어떤 저항감도 선생님의 목소리를 이길 수는 없다. 아이작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시어도어의 차분한 얼굴이 들어왔다. 시어도어는 아이작의 떨리는 손을 붙잡고는 말을 이었다.
“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물론 나도 죽고 싶지 않지.”
“…….”
“네가 정말 바라는 건 내가 여기서 영원히 갇혀 있는 거야?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아이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스승의 제자였으므로 긍정은 오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음이 정답과 반대로 향할 때, 그는 자신의 마음을 거칠게 꺾어서라도 선생님의 답지에 맞추고 싶어했다. 지금 같은 순간에조차. 아이작은 차마 선생님이 ‘그러면 안 돼’라고 할 답안을 내어놓을 수 없었다. 시어도어는 아이작의 침묵을 나름대로 해석한 듯 말을 이어갔다.
“너도 내가 자유를 잃는 건 바라지 않겠지.”
아뇨.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함께 밖에 나가 원하는 곳은 어디로든 가는 쪽이 훨씬 행복하잖아.”
저는 선생님과 함께라면 이 집에 평생 갇혀 있어도 똑같이 행복할 거예요.
“두려워서 하는 말인 거 알아.”
하지만 그건 선생님의 가르침이 아니겠죠.
“……아이작. 몇 번이나 말했지.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가르쳐준 사랑은 분명.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어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니까요.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추려 하는 게 아니라.
“어렵겠지만, 믿어줄래?”
상대가 바라는 내가 되고, 상대의 꿈을 이루어 주는 것.
사랑하는 이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
그게 시어도어 노스코트가 가르치고, 아이작 로도스가 배운 사랑이다.
단단한 손이 여전히 아이작을 꽉 붙들고 있었다. 아이작은 손의 뼈대에서 천천히 시선을 올려 선생님의 얼굴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런 말을 하는 선생님을. 이런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을 자신은 사랑해 왔다는 것을.
“……선생님.”
아이작이 목이 멘 투로 중얼거렸다. 다정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래.”
“만약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선생님은 뭘 하실 거예요?”
“갑자기 이런 질문 하는 거야?”
시어도어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글쎄. 난 큰 꿈이 있는 사람은 아니야. 당장 죽는다 해도 특별한 일을 하겠단 생각은 안 들어.”
“……그럼요?”
“그러니까 지금 생각나는 일을 해야지.”
시어도어가 장난처럼 말했다.
“너하고 수확제 거리를 걸을 거야.”
“…….”
“나도 기대하고 있었거든. 차와 어울리는 다과를 사올 생각이야. 식재료가 다 떨어졌으니 그것도 마련해야겠지. 올해 수확한 열매들로 오래간만에 근사한 상을 좀 차려도 괜찮겠어. 내 솜씨는 그다지 좋지 않지만.”
“선생님이 하신 요리는 늘 맛있어요.”
“그렇게 말한다면 다행이긴 한데. 네 몸이 괜찮으면 껍질 까기라도 좀 부탁할게. 그렇게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차를 마시자. 얼마 전에 시킨 찻잎이 있지?”
“……네.”
“내가 가르쳐준 걸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할 겸.”
그 말에 여전히 스승보다 한참 어린 제자는 한없이 지난 가르침들을 곱씹었다.
아이작 로도스가 섬긴 선생님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그러니 그의 몸은 하나도 빠짐없이 시어도어가 가르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창조주가 만들어낸 섭리를 인간이 거역할 수 없듯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별 거 아니지? 재미 없는 대답을 해 버렸네.”
“……그럼, 가요.”
“뭐?”
“수확제 거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외출해요. 저도 선생님과 함께 거리를 걷고 싶어요. 오늘을 기다렸어요…….”
“……괜찮겠어? 몸은.”
아이작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폈다.
“괜찮아요. 나갈 수 있어요.”
시어도어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래. 겉옷하고 목도리 가져올게.”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예정대로 수확제 거리로 나섰다. 낙엽을 밟고 축제 장식을 보며 다과를 골랐다. 아이작은 ‘뭐든 좋다’ 대신 다른 말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과 저것 중에는 저것이 좋아요. 노란 것과 빨간 것 중에선 노란 것이 조금 더 좋아요. 밤과 호박과 호두와 사과 중에서는 사과를 고를게요. 지금 이 순간이 좋아요. 선생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선생님이 좋아요……. 그 모든 말들을. 아껴놓았던 고백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시어도어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가, 가만히 시선을 멈췄다가, 곤란해하기도 하며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어느덧 석양이 내려앉은 시간이 되었다.
“마차를 타고 가자. 이 시간이면 돌아가는 길이 좀 붐빌 거야.”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저마다 손을 맞잡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침 마차 하나가 두 사람 앞에 섰다. 시어도어는 아이작을 먼저 태우고 뒤따라 올라타며 행선지를 말했다. 차창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는 주홍색 빛이 아이작과, 시어도어의 얼굴에도 내려앉았다.
“선생님.”
“그래.”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원래 약속했던 거잖아.”
“정말 좋았어요. 선생님과 수확제 거리를 걸을 수 있어서…….”
“…….”
“……정말로, 정말로 기뻤어요…….”
말끝이 점점 젖어들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억지로 눈물을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저를 용서한다고 해주셨던 날. 저는 그 날이 제 인생 마지막 날일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 주어진 시간들은… 전부 선물처럼 느껴져요.”
그러나 아무리 눌러도 속눈썹을 적시는 물기는 막을 수 없었다. 아이작은 젖은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이에요.”
“……과찬이네.”
“사실인 걸요.”
아이작은 조금 웃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 손을 뻗어, 시어도어의 손을 맞잡았다.
“선생님이 없었다면 저는 영영 사랑을 몰랐을 거예요.”*
“…….”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사랑받는 법도요.”*
“아이작.”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대답해 주세요.”
“……말해봐.”
이 질문은 아이작 인생의 마지막 용기이자.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라면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지금도 저를…… 사랑하세요?”
시어도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짙은 노을의 색이 그의 얼굴과 어깨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말이 길게 울었다. 시야가 돌아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아이작은 잡고 있던 손을 힘주어 당겼다. 시어도어가 아이작의 품으로 끌려들어가며 몸이 엉키고, 앉아 있던 자리가 바뀌었다. 그리고 우지끈 소리가 들린다. 마차가 부서지고, 마차의 파편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시어도어가 아닌 아이작의 옆구리로.
놀란 선생님의 얼굴이 보인다. 너무 큰 고통에 머리와 귀가 온통 먹먹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했으니까. 아이작은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선생님에게 가까이 하며 생각했다.
어떤 대답을 하셨어도 괜찮아요.
선생님이 저를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으셔도.
저는 언제나 선생님을.
인생에 주어진 단 하루처럼.
*길 정거 (감독). (2004). 이프 온리 [영화]. 인터미디어필름, 아웃로 프로덕션즈, 테이피스트리 필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