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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The Not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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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 123분

#로맨스 #멜로 #드라마

1940년대, 미국. 미군 장교 집안의 딸인 클레런스는 남부 마을에 있는 가족 별장으로 여름 휴가를 온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목수로 일하고 있는 소년, 카린을 만난다.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곧 클레런스의 부모님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선다. 한여름 밤 꿈 같던 시간은 찾아왔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끝난다. 이별. 5년의 시간이 지나 돌아온 여름.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재회하는데....

1.Summer Dream

 

이 로맨스는 남자주인공도, 여자주인공도 아닌 제 삼자의 한 마디로부터 시작된다.

 

“클레어야. 클레런스 호킨스.”

 

간단하게도 말한 제이콥은 경품으로 따낸 손바닥 만한 양 인형을 들어보이며 마샤의 이름을 불렀고, 시선 한 번을 겨우 샀다. 그러는 동안 카린의 시선은 마샤 바로 곁에 서서 범퍼카 타는 또래를 한심해하는 눈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낯선 여자애의 얼굴에 못박혀 있었다.

 

“여름 동안 피서를 왔대. 아버지가 엄청난 부자라는데.”

 

언덕 위 그 궁전 같은 별장 알지? 거기래. 낮 내내 흙먼지와 나무 가루를 뒤집어쓰며 일한 카린이 그곳에 오늘 내리 사람이 드나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 별장은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언덕의 맨 위에 케이크 위 딸기처럼 얹어진 아주 영롱한 저택이었으니까. 한여름의 태양빛을 새하얗게 반사하는, 그림같은 여름의 별장.

 

그래서 그런지, 시끌벅적한 한여름밤 축제 속에 오도카니 서 있는 그 애는 이 자리가 불편해보였다. 카린은 벗어서 부채질하던 모자를 다시 쓰고 한껏 모양을 냈다. 그래봐야 구깃한 낡은 모자였지만.

 

“가서 말 걸어 보게?”


“시도는 해봐야지.”

 

“거짓말. 너 여자애들한테 관심 없잖아. 연애라곤 책이랑 하는 게 전부면서.”

 

“그러는 너도 연애에 관심 있는 게 아니라 마샤한테 관심 있는 거잖아. 행운이나 빌어줘.”

 

“저 여자애에게 정말 관심이 있다고? 오, 카린. 우리가 이런 데에서까지 친구일 필요는 없어. 옆을 봐. 마샤랑 다니잖아.”

 

카린은 이미 범퍼카 대기 줄로 걸어가고 있었다. 등 뒤에서 제이콥이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조심해! 마샤같다면 점수를 따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카린은 등 뒤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조금 전 클레어를 발견했을 때부터, 그는 도무지 다른 곳에 눈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이는 건 클레런스 호킨스의 뾰로통한 얼굴 뿐인데 자꾸만 몸이 무언가와 부딪혔다. 귓가에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의 감탄사가 미끄러졌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그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클레런스 호킨스의 앞에 도착했다.

 

눈앞에 서기까지 한 번도 그를 향하지 않던 녹색 눈이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둑한 녹음綠陰과도 같은 초록빛 눈동자. 카린은, 카린 구드는 그녀가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번에 꿰뚫어보았다.

 

“무슨 용건이야?”

 

“안녕. 난 카린 구드야.”

 

약간 화가 난 듯도 했다. 그러나 정색한 클레어가 표정을 굳히자 투명한 뺨만 도드라져보였다. “그건 용건이 아닌 것 같아.” 연애와 자극을 찾아 피 끓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 창백한 뺨은 유독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데이트할 순 없잖아.” “뭐?”

 

아무래도 이 시골의 뜨내기들은 제 주제들을 너무 잘 알았던 모양이다. 이런 황당한 말은 처음 듣는다는 투의 반문에 묻어난 짜증은 옅었고 카린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오늘 밤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웃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데이트 하자.”

 

“싫어.”

 

“들어 봐. 오늘 일하고 오느라 꼴이 좀 이렇지만, 데이트 한 번은 해보고 찰 수도 있잖아.”

 

“널 차는 데에 데이트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그럼 잠깐 나들이 간다고 생각하면?”

 

“아니, 필요 없을 것 같…….”

 

“여기서 데리고 가줄게.”

 

“뭐?”

 

“여긴 너무 시끄럽잖아. 데이트 하기에 좋은 덴 아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 아니.”

 

카린은 조금 놀라 벌어진 입술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기묘한 자신감이 샘솟았다.

 

“가자. 조용한 데로 데려가줄게. 여긴 너무 시끄럽잖아.”



 

그날 밤 이후 카린과 클레어는 누군가 떼놓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 사람들처럼 붙어 다녔다. 온 젠슨빌 사람들이 그 열정적인 어린 연인의 증인이었다. 열일곱 동갑내기 남녀는 목공 일을 하는 카린의 퇴근 시간부터 클레어의 통금 시간까지 온 저녁 내내 들러붙어 마을을 쏘다녔다. 그들은 정말 모든 곳에서 목격됐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아이스크림 트럭 앞에서, 온 마을 연인들이 다녀가는 극장 안에서, 마을 외곽의 숲길에서, 바닷가에서. 그들은 그 모든 곳에서 재잘대며 웃었다. 부리 부딪는 새들처럼 쉴새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 밤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온 젠슨빌이 발칵 뒤집혔다. 통금을 넘겨 돌아오지 않는 부잣집 아가씨 클레런스 호킨스를 찾아 퇴근한 경찰들까지 야간 수색에 동원됐고, 제 발로 돌아온 어린 영애는 불같이 분노했다. 그녀의 당연한 부속물처럼 함께 자리에 있던 카린은 날뛰는 연인을 뒤로 당기며 상심하다 못해 분노한 그녀의 어머니 앞으로 나섰다.

 

“제가 사과드릴게요. 시간을 미처 보지 못했어요. 제 탓입니다.”

 

“물러나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카린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어머니!”

 

“클레어. 괜찮아. 호킨스 부인, 약속 드리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미스터 구드.”

 

그 누구보다 조용히, 그러나 그 누구보다 거대한 존재감으로 앉아있던 라이엇 호킨스는 카린의 이름을 불렀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나직한 호명으로 그는 세 사람의 입을 다물렸다. 참전한 적마저 있는 공군 대령 출신이라는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꼭 닮은 두 여자의 온 신경이 그를 향할 때 카린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이제껏 자신을 내버려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별 것 아니니까.

 

그는 별 것도 아닌 것에게 친절할 수 있을 만큼 신사였다.

 

“잠시 기다려 주겠나. 안쪽에서 부모자식 간에 이야기를 좀 나누고 오지.”

 

“……그럼요. 여기 있겠습니다.”

 

라이엇은 카린과 악수 한 번 나누지 않은 채 내실로 향했고, 부를 필요도 없이 두 여자가 그 뒤를 따랐다. 불안하고 미안한 얼굴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클레어에게 카린은 웃어주었다. 몇 번 웃어주지도 못했는데 육중한 문이 닫히고, 그는 사용인도 없는 현관에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고요하게.

 

문 너머에서 건너온 비명 같은 말다툼이 그를 할퀴었다. 너와 어울리지 않는 애야. 어머니! 저런 더러운 목수가 감히! 카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목수인 건 같은 목수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으므로 그 말만은 반박하고 싶었다. 

 

이윽고 말다툼 소리가 끊겼다. 카린은 그것만으로 라이엇이 말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양해를 구하며 자신을, 길가 돌멩이 보듯 하던 직전의 시선이 떠오르자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몸 돌려 그 집을 나섰다.

 

그러나 클레어는 어쩌지. 매끈한 포드 옆에 선 낡은 트럭의 운전석 문을 차마 열지 못하고, 카린은 그 집을 돌아보았다. 하얀 벽, 곧은 기둥. 고급스러운 우아한 나무 문과 금색 손잡이. 클레어는 자신의 방에 이미 몇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그는 이 집에 오늘 처음으로 발을 들였다. 그마저도 초대받은 적 없이 고작 현관까지만. 문득 그 사실을 상기하자 등과 어깨가 시렸다. 아름다워야 할 언덕 위 별장이 거인처럼 거대해보였고, 자신은 가진 것 없이 초라한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잊고 있던 사실처럼 깨달았다.

 

클레어가 달려나왔다. “카린!”

 

카린은 울며 달려나오는 연인을 향해 한 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다. 클레어가 아랑곳않고 달려들어 그를 껴안았다. 카린은 죄책감 속에 허리를 받쳐 안았다. “클레어.”

 

클레어는 미안하단 말을 사랑한단 말처럼 연신 속삭이며 그를 어루만졌다. 카린은 어쩐지, 그 눈물 젖은 뺨에 입맞출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해, 카린. 다시는 네게 이러시지 못하게 할게.”

 

“아니야, 클레어. 괜찮아. 괜찮아…….”

 

“괜찮지 않아! 네 목소리 좀 봐.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클레어.”

 

“카린, 카린……”

 

품안엔 클레어가 있었지만 카린의 온 의식은 눈앞의 대저택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 안에서부터 뛰쳐나왔다. 지금만이 아니라 언제나, 클레어는 이 아름다운 집에서 달려 나오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면 푸근한 마음에 휩싸이는 것과 정반대로 클레어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전에 없이 잔인한 사람의 표정을 얼굴에 걸었다. 카린은 또다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듯이 의식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사실을 하나 상기했다.

 

클레어는 이 집을 벗어나고 싶은 거야. 그 순간, 품안의 클레어가 그를 밀쳤다.

 

“무슨 생각 해?”

 

“…….”

 

“무슨 생각 하느냐고, 카린. 왜 안 안아줘?”

 

카린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등허리를 내리 받치는 데에 그치던 손이 떨쳐난 허공에 머무르다 아래로 떨어졌다. 그 꼬락서니를 본 클레어는 숫제 분노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러시지 못하게 하겠다고 내가 그랬잖아.”

 

“그게 무슨 소용이야.”

 

“뭐?”

 

“네 부모님이 날 마음에 들어하는 일은 없어, 클레어. 알잖아.”

 

클레어는 자신이 들은 게 영어인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카린은 쓴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몰랐을 리 없는 말을, 난생 처음 세상을 배우던 때처럼 듣는 클레어를 향해 낯선 감정이 싹텄다.

 

낯설고, 놀라운 감정은 그 정체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내 아버지는 목수야. 나도 그렇지.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해서 고작 몇 달러를 벌어.”

 

“그렇게 말하지 마.”

 

“네 아버지는 한 시간만에 수십 달러도 쓸 수 있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지 말라 했잖아!”

 

“왜? 왜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모르는 척하지 마, 클레어. 이게 현실이야!”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너와 함께 있는 데에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해?”

 

“중요해. 넌 그래서 날 골랐잖아.”

 

분노로, 창피로, 불과 몇 시간 전에는 설렘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던 클레어의 뺨이 핏기를 잃고 창백해졌다. 카린은 지금 막 뱉은 말들을 주워담으려 했다.

 

“아니야. 아냐, 클레어. 기억하지 마.”

 

“내가 그래서 널 골랐다고?”

 

다가가며 타일렀지만 이제는 클레어가 그를 거절했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카린은, 클레어의 상처 받은 표정에 새로이 상처 받았다.

 

“부모님이 아니라 내 얘기네. 내가 널 ‘골랐다’고? 이제껏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나 했어?”

 

“아니야, 클레어. 아니야.”

 

“아닌데 그렇게 매끄럽게 말할 수 있다고. 거짓말.”

 

“클레어. 흥분하지 말고—.”

 

“……정말이구나. 정말.”

 

클레어가 뒷걸음질쳤다. 직, 지익, 끌리는 구두굽 소리마다 그녀 얼굴이 표정을 잃어갔다. 카린에게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내내 그런 생각이나 하며 날 만났어.”

 

그리고 물러난 그녀 등 뒤에는 그 대저택이 거인처럼 버티고 앉아 카린을 굽어보고 있었다. 카린은, 고작 가난뱅이 목수에 지나지 않는 청년은 그에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

 

“…….”

 

“……들어가, 클레어. 내일 이야기 해.”

 

“내일 이야기하면 뭔가 달라져?”

 

망설임마저 잘라내고 조급하게 돌아온 대답은 마치 이 저택을 빙 둘러 세워진 담벼락이 둘 사이에도 돋아난 것만 같았다. 차라리 차가운 목소리였다면. 그러나 클레어의 목소리에도, 표정에도, 온도라곤 없었다.

 

“그럼 이야기하지 말까?”

 

“이야기하는 의미가 없잖아. 넌 이미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냉랭하기보다 무감하기를 선택한 클레어는 어느덧 저택의 일부처럼 딱딱했다. 그 무감한 시선에서 그녀 아버지를 연상하고 만 카린은 암담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

 

그는 자신의 낡은 트럭에 올랐다. 카 시트가 전에 없이 차갑고 딱딱해 서러웠다.

 

“잘 자, 클레어.”

 

열렬한 키스도, 애절한 포옹도 없이 간단한 인사는 둘 사이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밤, 그들은 그렇게 이별했다.

 

다음 날, 전에 없이 처참한 기분으로 일하던 카린은 호킨스 일가가 갑작스럽게 휴양을 끝내고 도시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차에 뛰어올랐다. 가까스로 대문을 들이 받지 않고 멈췄으나, 저택의 대문은 닫힌 게 아니라 잠긴 상태였다. 철창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정원과 현관이 휑뎅그렁했다. 클레어가 떠난 것이다.

 

그렇게 5년, 그는 그녀의 소식 한 줄 전해들을 수 없었다.




 

2.Wide Awake Summer

 

들이닥치는 불청객처럼 저택의 육중한 현관문을 열어젖힌 클레런스가 주인마님이 어디 있는지 찾으며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고, 누구도 감히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반응에 그녀는 한층 분노했다. 두엇 정도의 노련하고 용기 있는 사용인들이 접근해 진정시키려 시도했으나, 클레런스가 물어뜯을 기세로 노려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눈치 보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수가 한 사람과 팽팽히 대치하는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계단이 무게에 눌려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면서 모든 이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가까스로 겉옷을 챙겨 걸친 코델리아가 무슨 상황인지 누군가에게 묻기도 전에, 당혹스러워 보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클레런스가 말을 뱉었다.

 

“나한테 설명해요!” “켈리? 이 시간에 어쩐, 아직, 수업은.” “아니요. 어머니, 아니요! 내가 묻잖아요. 설명해요!” 벽에 대고 악을 지르는 절규에 가까웠다. 클레런스는 억세게 쥐어 너덜너덜해진 신문을 코델리아의 발치에 내던졌다. 그저 혼란에 잠겨 있던 낯에서 핏기가 가셨다. 곁을 지켜 선 헤더는 그녀가 비틀거리기 전에 팔을 잡아 부축했다. 그조차 하나의 과장된 연극 같다. 클레런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모친은 거짓말을 잘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까닭에 거짓말을 두르는 대신 입을 다물고, 답을 지체하며, 귀를 막은 채 외면한다. 그게 잘하는 한 가지였다. “내 말이 들리긴 해요? 설명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내가 말하고 있잖아요. 입을 다무는 걸 제발 그만해요.” “클레어, 나는…….” “아니요. 당신의 입장 말고, 난 당신이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게 궁금해요.” “…… …….”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내가 미안해.”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더 있어요?” “너한테 필요한 일이었어.” “뭐라고요?” “고작 여름 한 철에 있었던 일이잖니, 클레어. 사고 같은 거나 다름없어. 한때는 그게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겠지. 네 인생은 앞으로가 훨씬 길어. 할 수 있는 선택은 훨씬 많단다. 할 수 있는 일도.” “어머니.”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해, 클레어. 나중에 할 후회는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아. 그 남자애는 절대–,” “그만.” “너희 아버지가 알면 어떻게 할지 상상이 가지 않니. 난 너희가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코델리아의 입이 황급히 다물렸다. 이미 안색이 나쁜 얼굴이 한결 창백해졌다. 희게 질려 굳어 있던 클레런스의 양 주먹에서도 힘이 빠졌다. 체념 아닌 깨달음이었다. 그녀는 그 위에 질문 아닌 확인을 얹었다. “……그동안 그 애가 보냈던 소식 있어요?” 코델리아가 울 지경으로 침묵했다. 장례식 같은 적막 속에서 클레런스는 신경의 일부가 끊어지는 감각을 경험하였다. 노기와 맞닿은 무감각이 그녀의 표정을 지웠다.

 

클레런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조용히 돌아서서 들어왔던 경로 그대로 나가는 일련의 동작이 무성 영화의 필름을 편집해 이어 붙인 것 같았다. 그녀가 나가고, 멀어지고, 영영 멀어진 다음 엔진 시동음이 거칠게 울려 퍼질 때까지 복도에 있었던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거칠게 닦인 길 위로 타이어가 가로지른 자리마다 위태로운 진동과 먼지가 흔적을 남겼다. 소금기가 어린 푸른 바람에 클레런스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해안선을 따라 탁 트인 도로는 곧게 뻗지 않았을지언정 가로막혀 있지도 않았다.

5년간 이 길은 장벽이었다.

땅과 땅 사이에 놓인 대양처럼 넓고 험준해 감히 건널 도리가 없는 간격. 불가능을 척도로 환산한 길이. 그들이 오갈 수 없었고 편지가 오가지 않았으니 그래야만 견뎠다. 낯선 도시와 조금도 닮은 구석 없는 남서부의 온후한 햇살과 부드러운 해풍, 포말 사이사이로 윤슬처럼 맺힌 추억들을 영영 되풀이하면서.

클레런스는 뉴욕으로 떠난 일 년이 되어서야 차를 운전했다. 열일곱 살의 클레런스 호킨스와 스물두 살 그녀의 차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계속 그리웠다.

 

한참의 운전 끝에 바람의 형태가 변했다. 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잰슨빌 역시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낡게 바랜 차와 매끄럽게 번쩍이는 차가 도로마다 혼잡하게 섞여 있고 목조 상점 사이로 곡선의 파사드가 하나둘씩 끼어든 거리를 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갔다. 시가지의 낯선 풍경 위로 낯익은 장면들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클레런스는 이곳의 여름을 알았다. 모든 거리와 골목에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색채의 족적들이 보였다. 목적지는 여기보다 남쪽이었다. 그녀는 거리를 지나쳤다.

 

중심부를 벗어난 마을 외곽은 훨씬 그녀에게 친숙한 풍경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길을 똑똑히 기억했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차를 끌면서 클레런스는 어지럼을 느꼈다. 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전면 창 너머 한 폭의 정경이 풍경화처럼 담겼다. 무르익은 백금의 해안. 파도 소리가 들리는 저택. 울창한 백장미가 꼭 신기루처럼 흔들렸다. 차가 멈추었다. 클레런스는 조심스럽게 내려 한 발짝씩 다가섰다. 정원을 앞두고 걸음이 멈추었다. 이곳은 시간의 경과와 유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수평선과 한 쌍을 이루는 푸른 지붕, 새하얀 외벽, 정원과 바다가 함께 내려다보일 2층의 테라스 난간. 그리고.

현관문이 열리고 있었다. 외벽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네가 거기 있어야지. 머리 위 태양이 눈 부셨던 탓에 그녀의 녹색이 가늘어졌다. 만약 꿈이라면 바로 이 순간에 깨게 되리라고 클레런스는 생각했다. 모든 인생이 그런 식이었다. 가장 간절할 때 그녀 자신을 배반했다. 다만 그는, 클레런스가 기대하고 있는 이상으로 그녀의 예상을 깨는 사람이었다. 차츰 간격을 좁히는 발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클레런스는 눈을 감아버렸다. 화를 내야 할지 울음을 터트려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미안하다고 매달려야 할지 통 알 수 없었다.

“클레어!” 아는 그대로의 목소리. 복잡하게 꽉 찬 머릿속을 밀어젖히는 목소리. 다시 뜨인 클레런스의 눈가가 젖었다. 한쪽 구두가 벗겨져 잔디 위를 나뒹굴었다. 이미 서로 끌어안고 있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포옹은 짧았다. 기다렸던 세월에 비하면 아무리 길어도 찰나 같았다. 기세에 맡겼던 재회 이후 클레런스가 쑥스러운 기색으로 눈동자를 굴렸으나, 그녀와 정원 앞에 세워둔 차를 번갈아 바라보던 카린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끌었다. “짐이 적네.” “응? 급히 왔거든.” 정원은 이미 길이 닦여 산책로가 나 있었다. 바닷바람을 견디며 피어났을 흰 장미들이 싱그러웠다. 카린이 나왔던 바로 그 문이 다시 열리고 제 발로 내딛는 동안에도 그녀는 현실감이 부족했다.

그와의 재회를 언제나 상상했지만, 이런 장면은 없었다. 클레런스는 언제나 카린을 다시 만난 자신이 따지고 들지, 사과부터 해야 할지를 고민해 왔다. 그 사이에도 카린은 저택의 구조를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주방과 식당을 구경하고 서재와 응접실을 지나 거실에 도착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근황을 덧붙였다. 옛날보다 요리를 더 잘하게 되어 오븐에서 무언가를 태울 일은 없어졌다든지, 테이블보는 네가 좋아하던 가게에서 구매했다는 이야기 따위를.

 

거실에서 벽난로와 소파를 거쳐 커튼이 걷힌 창 앞을 지나칠 즈음, 클레런스가 제자리에 섰다.

“저기, 카린. 아직 나 묻고 싶은 게 남았어.”

카린이 이어서 발을 멈췄다. 돌아보는 입가의 미소가 여전했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알기에 오히려 물어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클레런스의 눈썹 끝이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있잖아, 왜 그렇게 태연한 거야? 그동안 연락 한 통 보내지 않았잖아. 우리 서로를 모르고 지낸 지 5년이나 지났어. 그런데 넌 꼭 그게 어제인 사람처럼 날 맞이하잖아. 꼭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역시, 카린은 놀라지 않았다.

“너한테 계속 편지했어. 1년간, 하루에 한 통씩.”

“……하루에 한 통? 계속?”

“네게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는 걸 보고 편지가 닿지 않았을 거라 짐작했어. 정말 그랬고. 그래서 멈췄어. 365통이었어, 클레어.”

편지를 받았다면 반드시 연락을 돌려줬을 것이다. 그 믿음 하나로 버텨왔노라고 그가 고백하고 있었다.

“5년은 정말 길었어. 이 집이 완성되고 장미가 핀 후에도 몇 년은 더 넘치는 시간이었어.” 카린의 시선이 잠시 그녀를 떠나 허공을 부유했다. “우리 침실과 우리 거실. 거기에 너만 없었어. 계속 기다렸어. 기다렸지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짧은 문장으로 축약했지만, 생략된 고독과 슬픔이 거기에 분명히 묻어났다. 부친의 임종을 지킨 후의 그는 정말 혼자였을 것이다. 클레런스는 카린의 손을 찾아 잡았다. 손마디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고개 기울여 품에 기대었다. 그녀를 감싸 안은 그에게서 무게가 실려 왔다.

“그때 내가 네 곁에 없었던 게 너무 속상해. 앞으로는 네가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들지 않을 거야.”

“알아, 클레어. 결국 네가 돌아왔잖아.”

“돌아간 다음에는 꼭,” “앞으로는 함께―,” 동시에, 그리고 어긋났다. 두 사람이 일제히 고개 들어 마주 보았다. 시간이 굳어 있던 찰나, 먼저 움직인 건 클레런스였다. 카린의 품을 벗어나 바로 섰다.

“잠깐만, 카린. 같이 산다고? 내가? 바로?”

놀란 듯이, 혹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뜬 카린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클레런스를 응시했다. 매일 해가 뜨고 지는 상식을 부정당한 사람 같았다. 무언가가 잘못될 것 같다.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

“싫은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거야. 나, 일단 집에 다시 돌아가 봐야 해. 부모님께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분명 문제도 생길 거고.”

그러니 나중에 돌아오겠다며 마무리하려던 차였다. 이번에는 카린이 그녀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의아해하는 클레런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래서 넌 날 다시 떠나겠다는 거야. ‘다시 만나 반가웠어. 잘 지내. 안녕.’ 그리고 끝? 그때는 어머니 손에 끌려갔다고 치자. 이번에는 네 선택이야.”

“내 뜻이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난 신문에서 네 얼굴을 보자마자 전부 무시하고 여기로 왔어. 며칠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오면 어머니는 내가 오늘 아침에 얼마나 당신께 건방지게 굴었는지 저녁 식탁 위에 올려놓을 거야. 아버지는 날 찾으려고 여기로 사람을 보내겠지. 그러면 또–.”

“또 넌 반항하는 척 그들 말에 따르기를 결정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클레어, 그러면 대체 여기는 왜 온 거야?”

카린의 말에는 날이 서 있었다. 이 순간에 충동적으로 뾰족한 부분을 세운 실수가 아닌, 무엇을 베게 될지 정밀하게 알고 있는 깊고 날카로운 무기였다. 그게 5년간 벼려진 것임을 깨닫고 나자, 클레런스는 울컥 울음이 치밀었다.

“널 보고 싶었으니까!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어머니는 내가 지쳐 죽을 지경으로 우는 동안 네가 보냈던 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 벙긋하지 않고 숨겼어.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5년이나 아무런 단서 없이 견디다가, 고작 신문 광고 따위로 네 소식을 접하자마자 온 거잖아. 모르겠어? 아니, 모르겠다고 말하지 마. 넌 알아야 해. 너는 날 알아야 해, 카린!”

카린은 여전히 차분했다. 클레런스가 아는 그라면 그럴 수 없었다. 그라면, 그녀가 격앙되어 있을 때 표정을 무너트리고, 목멘 소리를 들으며 부드러워져야 했고, 당장 안아주기 위해 팔을 벌리며 다가와야 했다. 그가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클레런스의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 서로가 팽팽하게 당기는 침묵이 이어졌다. 카린이 재차 말을 이으려고 입을 열었다. 차분하게. 그녀는 그게 본능적으로 싫었다.

“넌 그곳이 싫지, 클레어. 넌 그 집을 싫어해. 그래서 내가 필요하잖아. 그게 너희 아버지 신경을 거스르니까. 어머니가 반대하니까.” “그만해. 카린, 그만해.” “그거 알아? 너는 그러면서 그 집으로 돌아가! 내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그냥, 여름 한 철에 꾸는 꿈이라고 생각하지. 현실이야, 클레어. 이것도 현실이야. 넌 그냥 나랑 남아줄 생각이 없는 거고!”

그만하라고 했잖아. 문장이 목뒤로 사라졌다.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서늘하고 저릿한 감각과 함께, 클레런스는 카린을 망연히 응시했다. 벽력같은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그제야 추억을 박제한 액자 틀이 망막에서 걷히고, 클레런스는 그의 맨얼굴을 보았다. 5년. 사랑이 떠나고, 1년 간의 연락이 닿지 않고, 가족을 잃고, 그렇게 상처받은 사람의 초상이 거기 있다. 상처받은 카린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오직 그 사실로 인해 클레런스는 이해와 다른 것으로 대답했다.

“다시 말해봐.” 뱃속이 차가워졌다. 단숨에 뜨겁게 들끓는 온도로 뒤집혔다. “다시 말해보란 말이야!” 내지른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너도 날 만나러 오지 않았어. 자그마치 5년이었어. 내가 오지 않았으면? 10년도 기다리기만 했을 거야? 이 집이랑 너, 외따로이, 그렇게 웅크리고선 묻힌 것처럼? 내가 언제나 되어야 오는지 시험하면서? 넌 내가 무엇이랑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알려주지 않았잖아. 네가 뭐랑 싸우는지 알려준 적 없잖아! 네 적은 네 어머니가 아니지. 그래, 나도 그걸 깨닫는 데에 5년이나 걸렸어. 바로 지금에서야 알았으니까!” 클레런스가 고개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 않아.” 카린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클레어, 넌 스스로와 싸우고 있는 거야. 이대로 돌아가면 또 너한테 지는 거야.” “아니야!” “똑같아! 5년 전이랑 똑같이, 아무것도 없이. 그걸 진짜 원해?”

“그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넌 나한테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잖아!”

클레런스가 카린의 옷깃을 잡아 쥐었다. 억센 손아귀였지만, 그녀는 그를 당기지도, 밀쳐내지도 못한 채 매달렸다. 호흡이 짧게 끊어지며 거칠었다. 이를 악문 탓에 턱이 얼얼하다. “숨이 막혀.” 두 사람 중 누군가 숨을 삼켰다.

“숨이 막혀. 그 집에 있는 나는 사는 것 같지가 않아. 그런데, 이제 너도 나한테 못되게 굴어.” 서로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다. 서로를 상처 입히기 위해 상처가 될 말을 던진다. 하고 싶은 말이 달리 있었을 터였다. 오랜 세월 동안 바래게 두지 않았던 말들이. 클레런스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야. 진짜 싫어. 미워! 난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5년이 걸렸는데–,” “그래, 왔잖아!” 카린이 자기 옷깃에 매달린 그녀의 두 손을 감싸 덮었다. 흐트러진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흐느끼듯 들려왔다. “나한테 왔잖아. 그럼, 여기 있으면 되잖아.” 아니, 그는 정말 울음을 견디고 있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카린이 애써 눈을 맞추었다. 시선과 호흡과 체온이 모조리 자신을 보라고 호소하는 형태로 넘쳐흘렀다. 제발, 클레어. 제발.

“네가 오는 5년이 너무 길었어, 클레어. 이제 더는 싫어…. 날 미워해도 좋아. 날 사랑해 줘. 날 사랑해 줘…….”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커튼을 걷은 창밖으로 볕이 들고 있었음에도 클레런스는 시린 추위를 자각했다. 누구도 원치 않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각자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못내 설움이 벅차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카린이 먼저였는지 클레런스가 먼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달라붙은 것처럼 껴안은 두 사람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양지를 벗어나 그늘로. 창문이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이마가 맞닿았다. 뺨과 코끝이 서로를 찾아 붙었다. 입술이 먼 길을 돌아 맞물렸다. 수 차례 반복되었다. 거기 있는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듯이. 그러고 나서야 고요해졌다. 카린이 애처롭게 웅크린 작은 몸을 추슬러 안았다.

“어렵겠지. 네가 싸우는 게 네 어머니가 아니라 너 자신이라면, 넌 여길 선택한 다음에도 괴롭겠지. 그러면서 나도 괴롭히고.”

클레런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격정의 반동으로 묻어난 진득한 피로가 육신을 짓눌렀다. 할 수 있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더는 변명을 쌓고 싶지 않았다. 그녀 역시 카린을 사랑했다.

“하지만 기꺼이 그럴래. 널 사랑하니까…….”

컨텐츠 정보

출연

클레런스 호킨스

Clarence G. Hawkins

​제작

라히네, 마바

카린 구드

Karine Go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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